베네딕토 16세를 기억하며
베네딕토 16세를 기억하며
  • 윤현
  • 승인 2024.01.04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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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gnore ti amo! (주님,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출처 픽사베이
출처 픽사베이

지난해 12월 31일 베네딕토 16세 전임 교황이 선종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교황의 선종은 언제나 전 세계의 언론이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소식이다. 더욱이 종신직인 베드로 사도좌에서 스스로 내려온 교황이라는 점에서 생전에도 그의 행보에는 언제나 언론의 관심이 집중됐었다. 베네딕토 16세가 교황직에서 퇴임한 후, 그의 공식적인 직함은 명예 교황(Pope Emeritus)이었다. 이렇듯 지난 10년간 가톨릭교회에는 두 명의 교황이 있었다. 교황이 두 명 이상이었던 경우는 교회 역사 안에서 종종 등장한다. 그러나 그 안에는 추기경단의 알력 다툼 등 계속되는 반목과 분열로 점철되어 있었다. 반면 지난 10년간 두 교황을 모시고 있던 교회는 교회 역사상 가장 평화로웠던 두 교황의 시대를 보냈다.

 

 흔히 외신들은 베네딕토 16세와 프란치스코 교황이 서로 정반대의 사목 방식을 지니고 있다고 평가한다. 한 명은 냉철하고 예리한 지성을 가진 교회 학자이고, 다른 한 명은 복음에 나오는 전형적인 목자로서의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 그 이유다. 베네딕토 16세가 교황이 되기 전, 곧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일 당시 그는 신앙교리성(오늘날의 신앙교리부)과 국제 신학 위원회 위원장 등 교황청의 요직에 있었다. 특히, 그는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신앙교리성의 장관직을 수행하며 동성애, 여성 사제, 성직자의 아동 성추행 등 교회에 산적한 수많은 도전을 마주하게 된다. 그러한 도전 앞에서 그가 했던 수많은 판단은 가톨릭 신앙의 최전선에서 교회를 수호하는 기사요 견고한 성벽과 같았다. 때문에, 그는 교회의 보수주의적 신학자의 대명사로 여겨졌다.

 

 그러나 세간의 인식과는 다르게, 라칭거가 신학자로서 발돋움할 무렵 그는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신학 사상을 전개했었다. 특히, 독일 쾰른의 요제프 프링스 추기경의 신학 고문으로 참석했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그는 교회 개혁을 힘주어 말했다. 신학 자문이었기에 공의회장에서 발언할 수는 없었지만, 로마와 독일에서 공의회와 관련된 강의나 주석서를 발간하며 공의회 교부들의 관심을 끌게 된다. 훗날 라칭거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회상하며, 공의회가 이룩한 수많은 성과 중 교회 헌장(Lumen Gentium)이 제시한 교회론을 높게 평가했다. 교회 헌장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실재를 현재화하는 성사로 이해했다. 이는 교회와 교계 제도를 동일시하여 교회를 법적 기관으로 이해했던 종래의 교회론적 해석의 한계를 극복한 것이었다. 라칭거의 박사 학위 논문인 『성 아우구스티누스 교회론 안에서 하느님 백성과 하느님의 집』에서 볼 수 있듯이 그에게 교회란 친교의 성사를 나누는 곳이었다. 라칭거의 교회론 안에는 어떠한 정치적 압력이나 성직주의도 존재하지 않는다. 교회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성사적 유대가 이뤄지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교회론 외에도 공의회 당시 라칭거의 주장들은 진보적인 색채를 띠었다. 공의회의 다양한 신학적 논쟁에는 ‘유익한 긴장’이 흐르고 있었고 라칭거의 사상적 씨앗은 싹트기 시작했다.

 

 그런데, 1968년 라칭거가 평생 잊을 수 없는 사건이 벌어진다. 1968년은 그야말로 격동의 해였고 당시 라칭거는 독일 신학계에서 최고로 평가받는 튀빙겐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신학자로서 절정의 시기를 보내고 있던 라칭거에게 68혁명이라 불리는 사상적 운동은 그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마르크스주의가 서유럽을 강타했고, 독일 신학을 대표했던 튀빙겐 대학의 신학과가 마르크스주의 운동의 중심지로 변해버린 모습은 라칭거에게 충격을 주었다. 게다가 혁명은 반그리스도교적인 운동으로 변질하기 시작했다. 개신교 학생 연맹(Protestant students union)은 ‘예수의 십자가란 고통을 가학적 혹은 피학적으로 찬양한 것이 아닌가?’라는 자극적인 문구를 담은 전단을 배포했다. 또한, ‘예수에게 저주를’이라는 구호는 튀빙겐 대학과 서유럽 전체에 울려 퍼져나갔다. 라칭거는 학생들에게 반그리스도교적인 선전을 중지할 것을 요청했고 그때부터 학생들은 그에게 온갖 수모를 안겼다. 이를테면 학생들은 그의 수업에 훼방을 놓고, 비협조적으로 참여했다. 정치적 이데올로기는 도구화되어 냉혹하고 잔인하게 휘둘러져서 교정은 아비규환이 됐다. 심지어는 학생들의 운동을 지지하던 교수들조차 학생들에게 마이크를 빼앗겨 교단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라칭거는 십자가가 가학 피학성의 상징으로 멸시받고, 그리스도교를 장신구처럼 여기는 신앙인들의 위선을 목격했다. 결국 1969년 라칭거는 튀빙겐 대학을 떠나 레겐스부르크로 떠나게 된다. 

 

 이렇듯 라칭거는 언제나 격동의 시기 그 중심에 있었다. 그는 독일 나치가 통치했던 12년, 곧 제3 제국에서 유년 시기를 보냈으며 사제가 된 후 교회의 개혁을 역설했고 68혁명의 소요 속에서 신학자로서 교회의 가르침을 고수했다. 마르크스주의와 상대주의는 종교를 한갓된 망상 내지는 인민의 아편으로 전락시켰다. 게다가 근대주의의 잔재는 청산되지 못한 채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그리스도교가 추구하는 자유는 인간의 자율성을 억압하는 족쇄로 평가절하됐다. 신앙교리성의 장관이 된 이후 라칭거는 해방신학의 지나친 정치적 성향에 맞섰으며 다원화되는 현대 사회에서 교회에 제기되는 수많은 논쟁에 맞서는 선봉장을 자처했다. 그런데 그가 마주했던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신자 수의 급감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었다. 신앙인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본질적 정체성을 내어주면서까지 현실과 타협하고 있었다. 공의회 이후 가톨릭교회의 신자 수와 미사 참여율이 급감했고, 성직자와 수도자의 환속은 증가했다. 특히 오랜 역사와 체계적인 신학적 배경을 지닌 수도원들이 가장 큰 위기를 맞았다. 자유주의적 사상이 신자들 안에 팽배해있었고, 이는 교회에 치명적이었다. 이런 신자들은 동성애와 피임을 금지하는 것과 같은 윤리적 문제에 대한 교황의 교의를 거부했다. 사람들은 무절제한 쾌락을 즐겼고 자유는 방종으로 변질하였으며 신앙은 끊임없이 매도되고 왜곡되었다. 

 

 교회에 던져진 도전장 앞에서 라칭거 선택한 해결책은 단 하나의 진리, 곧 예수 그리스도였다. ‘수직적이고 수평적인 육화의 교차점’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는 라칭거 신학의 중추를 담당했다. 라칭거는 자신의 신학을 가리켜 ‘육화 신학’이라 정의할 정도였다. 그는 모든 신학이 그리스도께로 정향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또한, 그는 인격 자체인 진리, 곧 예수 그리스도를 해석할 수 있는 유일한 논리(Logik)가 상호 인격적인 대화(Dia-Logik) 안에서 구축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2004년 ‘바이에른 가톨릭 아카데미’ 주최로 열린 ‘대화의 밤’ 행사에서 라칭거는 당대의 자유주의를 대표하는 독일의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와의 대화를 나누며 유럽의 현주소를 진단했다. 라칭거는 ‘신앙의 병리학’을 주장하는 시대의 목소리를 인정하면서도 계몽주의가 지닌 ‘이성의 병리학’도 존재함을 꼬집어 과학만능주의와 고삐 풀린 인간 이성의 위험성을 지적한다. 나아가 신앙과 이성은 긴밀하게 상호 관련되어 있으며, 둘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고 이야기한다. 라칭거는 계몽주의가 지닌 병폐를 타파하기 위해 현대인에게 요구되는 미덕으로 경청을 제안한다. 신앙과 이성은 경청을 통해 상보적 관계를 맺게 되어 서로에게 개방적인 자세를 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앙과 이성의 조화 그 중심에는 그리스도가 자리 잡고 있다. 그리스도론은 그에게 신학적 전제와 같았다. 즉, 모든 신학은 그리스도로부터 출발해야 하며 최종적으로는 그리스도로 수렴해야 했다.

 

 라칭거가 강조해 마지않았던 그리스도 중심성은, 그에 대한 세간의 평가를 바꿔놓는 계기가 됐다. 아울러 신앙교리성의 장관이라는 직무는 라칭거가 변화했다는 평가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근거로 작용했다. 때문에, 언론은 흔히 라칭거의 사상사가 초반에는 교회 개혁적인 성향을 보였지만, 시간이 흘러 교회를 수호하는 보수주의적 성향으로 변화했다고 평가한다. 사실 라칭거도 은퇴 이후 독일의 저명한 저널리스트인 페터 제발트와의 인터뷰에서 공의회 때를 회상하며 자신이 그 당시 진보 진영에 속해있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라칭거는 이에 덧붙여 당시의 진보는 신앙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오히려 진보란 신앙을 잘 이해하고 근본적으로 실천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론이었다. 이 사실은 라칭거에 대한 세간의 평가, 곧 진보에서 보수로의 사상적 전환을 다시금 생각해보게 한다. 과연 라칭거는 진보에서 보수로 변한 것인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은 “Aggiornamento”(현재화 또는 금일화)와 “Ressourcement”(원천으로 돌아가기)였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두 단어는 상반되는 것처럼 보인다. 단어의 뜻만 놓고 보자면, 전자는 교회가 언제나 쇄신해야 한다는 진보적인 운동을, 후자는 교회의 원천으로 돌아가자는 보수적인 움직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공의회에서 이 두 가지는 충돌하지 않고 서로 조화를 이뤘다. 왜냐하면 교회의 발전과 원천의 중심에는 항상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라는 신앙의 원천은 쇄신과 발전을 지양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들을 향해 개방되어 있다. 또한, 그리스도의 현재화는 전통과 관습을 배제하지 않는다. 신앙의 원천은 마르지 않으며, 그리스도는 세상 창조 때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같으시기 때문이다. 오늘날 라칭거에 대한 평가에는 이러한 생각이 결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언론은 교회 내의 신학적 성향을 순전히 정치적인 논리로써 구분한다. 진보와 보수는 서로 융화될 수 없으며, 언제나 대척점에 서 있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성사인 교회를 이분법적이고 정치적인 관점에서의 보수와 진보로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할 뿐이다. 왜냐하면 교회 안에는 그리스도라는 일치가 놓여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통한 일치 안에서, 혼란의 시기를 겪는 교회가 행해야 할 사명은 시대의 흐름에 발맞추어 교회의 본질적 정체성을 내려놓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안에서 교회는 더욱 성화(sanctificatio) 되어야만 한다. 21번에 걸친 보편 공의회가 내린 결론은 늘 한결같았다. 교회가 보다 거룩해지는 것,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살아가야만 한다는 것이다. 결국 라칭거의 신학은 진보에서 보수로 전환을 맞은 것이 아니라, 더욱더 그리스도를 향해가는 여정 중에 있었던 것이다. 공의회를 비롯한 시대의 수많은 변곡점을 거쳤던 라칭거는 언제나 교회와 자신의 본질적 사명을 관철했다. 그의 사명은 교수(professor)이자 증거자(confessor)로서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는 신학 교수로서 하느님의 말씀을 열정적으로 탐구했고, 증거자로서 자신의 온 삶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도록 노력했다. 그리스도로 정향 되어있던 그의 신학 사상이 삶과 유리되지 않았기에, 그의 삶이 여전히 우리에게 큰 울림을 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오늘날 교회는 누구를 바라보고 있는가? 그리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는 어디를 향해 있는가? 이러한 물음에 베네딕토 16세는 적확한 해답을 제시한다. 베네딕토 16세 전임 교황 성하의 영적 유언의 한 구절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신앙 안에 굳건히 머무르십시오! 자신을 혼란 속에 방치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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