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과 함께’를 곁들여 ‘하느님께로’
‘하느님과 함께’를 곁들여 ‘하느님께로’
  • 이학주
  • 승인 2024.02.02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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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부활의 기쁨으로 채워지는 오뉴월, 만물이 소생하는 시기가 지나고 녹음이 우거지는 시간이 왔습니다. 저는 5월 말에서 6월로 넘어가는 이 시점을 참 좋아합니다. 아름다운 꽃이 피는 3월, 4월도 좋지만, 이 시기의 아름다움은 왠지 모르게 금방 져버릴 듯한 불안감을 줍니다. 비 한두 번 오면 사라질 꽃들의 허무한 아름다움과 생명력에 비해, 지속적 생기를 표상하는 오뉴월의 아름다움은 안정감과 생명의 경탄을 모두 주는 지속가능한 생명력으로 느껴집니다. 학기를 여는 아름다움은 현세의 아름다움을, 학기를 마무리하는 생명력은 부활의 생기를 드러내는 듯합니다. 
부활이 전달해주는 이 생명력을 묵상하다 보면, 하느님의 사랑을 한층 더 강하게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한층 더 강하게 느껴진 하느님의 사랑은 이를 느낀 이로 하여금 더 많은 사람을 이 초월적 기쁨으로 초대하고 싶게 만듭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억울함과 보상 심리 
하지만 모두가 그러한 초대에 적극적으로, 온전히 동참하는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는 자기 탓 없이 복음과 교회가 구원에 있어서 필수적임을 알지 못해 그 부름에 온전히 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공식적인 의견은 희망을 줍니다. 자신의 탓 없이 복음과 교회의 필요성을 모르더라도 양심의 소리를 행실로 따르며 하느님을 내심 진실히 찾는 이들에게 구원의 희망이 배제되지 않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실한 신자는 이러한 공인이 '서운'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런 식으로 말이죠.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교회의 규범들과 그리스도교 윤리를 충실히 지켰다. 아무리 저 비신자들이 양심적으로 살려 했다고 한들, 이러한 윤리를 온전히 알고 지키지 못했을 텐데, 이를 충실히 지킨 나와 같은 보상이 기다리고 있다니! 차라리 나도 몰랐더라면 좋았을 것을!’ 특히 자신이 교회에 헌신한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성직이나 수도 성소 길을 걷는 사람의 경우 이를 더 크게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푸념은 제가 사제 성소를 처음 느꼈을 때 가졌던 감정과 궤를 같이합니다. 솔직히 당시에 저도 ‘차라리 이 삶으로의 부르심을 몰랐었더라면’ 하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이 부류의 생각은 보상 심리의 한 종류로 보입니다. 신앙인으로서 규범을 더 충실히 지킨 우리는 우리가 보기에 그에 미치지 못한 이들보다 필연적으로 더 나은 보상을 받아야만 한다고 무의식적으로 전제하는 것이죠. 그리고 이는 현재 자기 처지가 불만족스럽기에, 이를 채워줄 듯한 것을 찾는 막연한 마음에서 기인하는 것 같습니다. 한마디로, 지금 충분히 행복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지금이 아닌 훗날의 결과물에만 집중하거나 그리스도교적 가치와 무관한 것에서 행복을 찾으려 합니다. 그런데, 행복이란 무엇일까요? 우리가 ‘행복하지 않다’라고 할 때,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해 진정으로 이해하면서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참된 행복, 그리고 믿음 
행복은 일반적으로 우리의 욕구가 채워질 때 옵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의 충족에 대해 하느님께서 모든 것에 모든 것이 되실 때, 즉 종말 때 충족되지 않은 욕망이 남아있지 않을 것이라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때 종말은 단순히 세상의 끝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종말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우리가 서로를 사랑할 때 성취되기 시작합니다.(「요한 복음 주해」 참조) 아우구스티누스의 맥락을 따르면 참된 욕구가 단순히 현세의 감각적 쾌락과만 관련되지 않음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종말은 분명 하느님께서 정하신 시점에 손수 완성하십니다. 그런데 성인은 새 계명(“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사랑이 우리를 종말로 이끌어준다고 합니다. 종말에 있어서 인간의 역할이 있듯 말입니다. 그렇다면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요한 복음사가가 이야기한 종말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일까요?

 

요한복음서는 공관복음서들과 종말론에서 차별성을 지닙니다. 종말의 미래적 차원을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지금’ 믿는 이들이 ‘이미’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갔다는 현재적 종말론을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아드님이라 믿는 순간 이미 종말, 즉 영원한 생명의 핵심인 하느님과의 관계가 시작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 ‘믿기로 결단 내릴 때’ 종말은 이미 온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과 밀접히 관련됩니다. 이 종말론적 사랑이 우리를 진정한 의미의 욕구 충족, 즉 행복으로 인도합니다.

 

이제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이야기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이해는 미래적 종말론만을 기반으로 하여 그 결과물을 중심으로 보고 있는 우리에게 바로 지금 올바른 행복을 추구하고 있는지 자성하게 합니다. 참된 행복은 참된 믿음과 하느님에 대한 현존의식, 그리고 사랑을 바탕으로 자라납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부터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가는 여정 
제가 대단한 신심을 지녔기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 또한 시련과 좌절 앞에서 하느님께 항의하는 약한 인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 안에서 항상 저와 함께 해주시는 하느님을, 도무지 끝내 미워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하느님과 그리스도인의 관계를 연인 사이로 비유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지금도 그 비유를 적용해봅니다. 연인 사이의 사랑은 해피엔딩 때문에만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온갖 역경과 고난을 함께 해나가는 그 여정이 참으로 아름답고 가치를 지닙니다. 함께 하는 순간 하나하나가 소중합니다. 목표 지점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그 과정도, 비록 참담할지라도 아름답습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도 그러합니다. 목적지는 당연히 찬란합니다. 하지만 그 가는 길은 힘겹습니다. 차라리 몰랐더라면 싶어질 정도로 말이죠. 하지만 함께 이 길을 가주시는 분을 의식하면서 나아갈 때, 그 길은 가슴 벅찬 십자가의 길이 됩니다.

 

지금 우리가 일종의 억울함을 느끼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 인생의 여정에서 ‘하느님과 함께함 자체 때문에 느껴지는 기쁨’이 빠져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이 감정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정화하라는 하느님의, 그리고 나 자신의 부름이지 않을까요? 이 정화가 이루어질 때 우리는, 그 열매만 맛볼지 모르는 익명의 그리스도인들과는 달리, 지금부터 시작되는 하느님과의 복된 사랑의 길, 그 현존을 벌써 누리는 특권을 지니고 있음을 깨달을 것입니다. 이에 따른 기쁨으로 부활 시기를 충만한 행복 안에서 마무리하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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