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노동
인간과 노동
  • 윤현
  • 승인 2024.02.02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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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디아스포라(Diaspora)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지난 3월 6일 고용노동부(장관 이정식)는 「근로시간 제도 개편 방안」을 통해 새로운 노동 정책을 발표했다. 정부는 ‘근로자의 선택권, 건강권, 휴식권 보장’을 지향점으로 삼아 대대적인 개편을 추진했다. 

 

 

개편안 주요 내용 
현재 우리나라의 근로시간 제도는 ‘주 단위 상한 규제’ 방식을 따르고 있다. 다만, 2018년에 근로시간 단축을 위해 도입된 주 52시간제(법정 근로시간 40시간+연장 근로시간 12시간)의 형태로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그런데 ‘주 단위 상한 규제’는 근로시간이 곧 임금이 되는 공장제 생산방식에 반영되었던 제도로, 4차 산업 시대인 오늘날에는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특히나 연장근로와 관련해서 그 문제점이 여실히 드러났다. 이를테면, ‘주 단위 상한 규제’에서는 장기적인 프로젝트로 인해 연장근로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연장 근로시간 12시간을 넘길 수 없었다. 이는 평소보다 일이 몰릴 때 회사의 유연한 대응을 가로막고, 한 사람만 근로시간을 초과해도 사업자가 처벌을 받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주 단위의 연장근로 상한 규제는 제도의 경직성을 유발하면서도 근로자의 건강권과 휴식권도 보장하지 못한 것이다.
이에 정부는 주 52시간제의 틀은 유지하되, 노사가 합의를 통해 연장 근로시간 관리 기준을 월, 분기, 반기, 연 단위로 확대하여 운영할 수 있게 했다. 몇 가지 상한 준수 규정 등이 있지만 결과적으로 이 덕분에 노사는 연장 근로시간의 총량을 관리하여 근로시간을 선택할 수 있게 됐다. 정부의 계획은 일이 몰리는 주간에 연장근로를 집중적으로 실시하고, 상대적으로 일이 적은 주에는 조기 퇴근이나 선택 근로를 통해 휴식 여건을 보장하겠다는 것이다.
한편, 그동안 법정 근로시간 외의 근무에 대해 임금 대신 휴가를 부여하는 보상휴가제는 정확한 운영 기준이 없어 사용이 제한적이었다. 이를 겨냥한 개편안은 근로시간 저축 계좌제를 새로 도입하여 추가 근로와 관련된 구체적인 법적 기준을 마련했다. 저축 계좌에 쌓인 휴가는, 후에 연차 휴가와 결합하여 안식월, 제주도 한달살이와 같은 장기휴가로 이어진다.

 

이렇듯 이번 개편안은, ‘주 단위 상한 규제’의 경직성과 획일성에서 벗어나 노사의 선택권을 강화했다. 이는 4차 산업혁명에 걸맞은 노동 인프라를 구축하여 근로자의 삶의 질 제고와 기업의 혁신과 성장을 도모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개편안의 문제점
그런데, 개편안이 발표되자마자 여론의 반응은 심상치 않았다. 개편안에 대해 거의 사회 전체, 특히 노동계와 관련 지식인들의 반대가 거셌다. 이에 고용노동부는 개편안 발표 한 달 후인 4월 17일에 기자간담회를 열어 두 달간의 의견수렴 기간을 거친 뒤 개정안을 내놓을 것이라 밝혔다.

 

사실 이번 개편안에는 세밀한 부분에서 검토되지 않은 부분이 존재했다. 개편 관련 논의가 시작될 무렵 이정식 장관은 ‘주 단위 상한 규제’가 전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대한민국에서만 시행된다는 점을 지적했다. OECD에 가입한 나라 중 대부분이 근로시간을 주 단위보다 확대하여 관리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해당 국가들의 연장 근로시간은 개편안이 제시한 52시간보다 적었다. 가령 일본의 경우 관리 기준은 1개월에서 1년으로 개편안과 비슷하지만, 연장근로 시간은 월 45시간으로 개편안보다 7시간 적었다. 연간 노동시간 또한 다르다. 2021년 기준 우리나라의 연간 노동시간은 1,928시간이다. 이는 1,633시간을 기록한 일본보다 300시간가량 많은 수치이다. 결국 ‘주 단위 상한 규제’ 해결에만 집중한 나머지 근로시간 자체에 대한 문제를 다루지 못한 것이 이번 개편안의 패착이라 볼 수 있다.

 

이번 개편안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진 개념은 바로 선택권이다. 개편안은 특히 MZ세대 특유의 권리의식을 강조한다. MZ세대는 상당히 뛰어난 권리의식을 가지고 있기에, 각종 성과금이나 급여 일반에 대한 근거들을 기업에 적극적으로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젊은 근로자들의 상황을 전혀 알지 못하는 정부의 현주소를 드러낼 뿐이다. 현재 젊은 세대들은 말단 근로자로 근무하며 유급휴가도 쓰지 못하고 있다. 기본적인 권리로 주어지는 연차도 사용하지 못하고 눈치를 보며 휴가를 가는 상황에서 개편안이 이야기하는 근로시간 저축을 통한 장기휴가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개편안이 직면한 가장 치명적인 맹점은 회사에 일이 없는 때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근로자 수가 적거나 인력 부족에 시달리는 중소기업에서는 특정 주에 일을 집중적으로 하고 남은 주간에 휴식을 취한다는 생각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노동자의 근무환경 개선을 위해 도입된 주 52시간제에서도 지켜지지 않았던 일과 휴식의 균형이 개편안을 적용한다고 해서 개선되기는 힘들어보인다. 오히려 개편안에 따라 근로시간이 69시간으로 늘어나 근로자의 과로 문제는 더욱 심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노동의 진정한 의미
근로자가 노동 현장에서 겪는 상황과 유리된 채 발의된 이번 개편안에 노동의 주체로서의 인간 존재에 대한 고찰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노동을 오로지 유물론적 관점에서 이해했던 물질주의의 오류를 반복하는 셈이다. 물질주의는 노동과 재화의 가치를 전도시켜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한다. 물질주의 안에서 물화(物化)된 인간은 냉혹하게 착취되고 노예로 전락한다. 물질주의는 인간에게 유배를 선고한다. 일찍이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회칙 「노동하는 인간」(Laborem Exercens)에서 주관적 의미의 노동, 곧 노동의 주체로서의 인간을 강조하며, 인간을 상품 내지는 생산 과정에서의 도구로 간주하는 물질주의를 철저하게 배격한다. 노동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그 일의 주체이며 목적인 인간 자신에게 있다.(CCC 2428항 참조) 그리고 인간은 노동으로써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 동참한다. 이 사실은 인간이 노동을 성화의 수단으로 인식하는 계기가 된다.

 

이는 우리 그리스도교와 긴밀한 사상적 접점을 지닌 유다교 전통에서 특히나 강조된다. 유다인에게 노동은 목적을 위한 수단이며 그 목적은 하느님의 창조를 기억하는 것이다. 그들은 “보시니 좋았다.”라고 하신 말씀과 창조의 순간을 노동의 현장에서 되새겼다. 그리고 그들이 끊임없이 반추했던 창조에 대한 기억은 안식일에서 절정에 달했다. 유다인에게 안식일은 그저 막간의 시간, 잠깐의 휴식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날은 삶의 절정이다. 그들은 한 주간의 평일이 안식일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안식일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휴식하신 날(탈출 20,11)이요, 이스라엘 백성을 유배지인 이집트, 곧 종살이에서 해방하신 날(신명 5,6)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한 주의 엿새 동안 노동을 통해 세상을 다스리는 데 집중한다. 그리고 안식일에 하느님을 만나고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데 집중한다. 그래서 유다인은 안식일을 “시간의 지성소”라고 부른다. 이렇게 그들은 시간 안에서 끊임없이 성화의 요소를 발견했다.

 

시간으로 건축된 유다인으로서의 정체성은, 그들이 겪었던 숱한 고초 속에서 그들을 붙들어주었다. 유다인의 조상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의 땅에서 추방되어 유배지에서 모진 고난을 겪으면서도 그들의 신앙을 잃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성전이 파괴되어 하느님께 예배를 드릴 수 없는 상황에서도 새로운 방식으로 하느님을 찬미했다. 유배를 겪으면서 그들은 하느님이 공간과 장소에 귀속되시는 분이 아니라, 시간 안에, 그리고 영원 안에 계시는 분으로 이해하게 됐다. 마침내 그들은 시간 속에서 하느님과 영적인 대면을 하게 된 것이다.

 

디아스포라의 이스라엘 백성은 안식일 준수를 통해 유배지에서 그들의 정체성을 재확인하고 공고히 하여 유배 시기를 버텨낼 수 있었다. 이제 유다인들은 안식일을 기억하며 육일 간의 노동과 수고로움을 감내한다. 만약 그들에게 안식일이 없다면, 노동은 인간의 존엄성을 상실한 불행의 원인이 된다. 또한, 안식일을 하느님을 기억하지 않고 단지 휴식의 시간으로서만 보낸다면, 그것은 방종과 타락에 불과하다. 그들에게 안식일은 창조와 탈출이라는 유다인의 근원을 경축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현실과 교회의 과제
바빌론으로 유배를 떠난 이스라엘 백성처럼, 오늘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세속화와 물질주의라는 유배지로 추방됐다. 세상은 고도로 발전하고 삶의 질은 높아지는데 인간의 직면한 현실은 더욱 암울해지고 있다. 사실 현대인의 유배는 이스라엘 백성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일 뿐만 아니라 더 비참하다. 세속화와 물질주의의 위협 아래서 우리는 더 이상 안식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이보다 심각한 문제는 서로가 공동의 정체성을 공유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정체성이 위협받는 상황 속에서 민족 공동의 정체성을 구축하여 서로 간의 유대를 다질 수 있었고 마침내 살아남았다. 반면, 오늘날 우리는 개인주의의 풍토 안에서 파편화된 ‘개인 디아스포라’를 형성한다. 현대인들은 이 디아스포라에서 타인과 공유하는 요소를 거의 가지지 못한 상태로 외롭게 유배 기간을 보낸다. 결국 그들은 서로에게 철저한 타인으로 남는다. 아니, 타자 관계조차 소멸하여 그저 자아에 매몰된다. ‘개인 디아스포라’에서 그는 공허해지고 마침내 소멸한다.

 

작금의 사태 앞에서 교회는 우선 물질주의로 인해 훼손된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시켜야 한다. 그리고 외로운 이들로 하여금 그들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어야 한다. 개인화된 디아스포라에서 겪는 비참함에서 벗어나 공동체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그들을 위로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는 그들이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는 것을 통해 가능하다.

 

공동체성이 위협받고 있는 현실이다. 유다인들이 그랬듯이 우리의 공동체성을 확인시켜주는 계기는 바로 하느님의 현존이다. 인간의 가치가 위협받는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을 기억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하느님 안에서 서로에게 이웃이 되는 동시에, ‘나’로서의 정체성을 진정으로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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