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칼럼] 새로운 출발은 오늘 하루를 성실히 살아간다는 것
[교수칼럼] 새로운 출발은 오늘 하루를 성실히 살아간다는 것
  • 박진수 사도요한 신부
  • 승인 2024.02.02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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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아주 멀리까지 가보고 싶어 그곳에선 누구를 만날 수가 있을지 아주 높이까지 오르고 싶어 얼마나 더 먼 곳을 바라볼 수 있을지…."

김동률이 부른 '출발'이라는 노래 가사의 첫 부분입니다. 유학을 준비하는 동안 한국에서, 그리고 로마에서의 학업을 준비하기 위해 페루자라는 곳에서 어학을 하는 동안, 자주 들었던 노래입니다. 이 노래를 들으면 '새로운 시작'이 주는 설렘, 긴장, 걱정, 낭만, 그리고 기대와 희망이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유학 초기 시절에, 종종 이 노랫말들을 떠올리며 저 자신을 격려하곤 했습니다. 무언가를 이루어 높이 오르자는 다짐을 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새로운 배움을 통해 조금이라도 더 먼 곳을, 더 많은 것들을 바라볼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그렇게 되도록 노력해보자고 마음을 다졌다는 의미입니다.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시작한 유학 생활. 긴장과 걱정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에 못지않은 기대와 설렘이 있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배움이라는 과에서 많은 경우에 그러하듯이, 생각했던 혹은 기대했던 이상과 지금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현실은 사뭇 달랐습니다. 제가 수학한 로마교황청립성서대학원 (비블리꿈)에는, 여타 교황청립대학과는 다른 독특한 제도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예과 과정'입니다. 성서를 전공해야 하니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히브리어와 희랍어를 아는 것이고, 석사과정에 올라가 본격적으로 성서를 배우기 전에, 그 능력을 함양하는 과정이 바로 예과 과정입니다. 그냥 아무런 걱정 없이 히브리어와 희랍어를 배운다면야 쉽지는 않아도 나름대로 즐겁게 공부했을 것도 같습니다. 하지만 학교 측에서는 제도를 통해서 학생들이 긴장을 늦추지 않도록 무언의 압박을 했는데, 그것은 바로 '예과 과정 통과가 석사과정 입학의 자격조건'이라는 것입니다. 

 

궁금해하실 분들이 있을 것 같아서, 비블리꿈의 예과 과정을 잠시 소개합니다. (소개하기에 앞서, 노파심에 한 가지를 먼저 말씀드립니다. 전공과목이나 학교에 따라 각각의 고유한 어려움들이 있습니다. 제가 겪었던 비블리꿈에서의 어려움을 나누는 것뿐이며, 타전공/타학교와의 비교 안에서 언급하는 것이 아님을 말씀드립니다.) 비블리꿈 예과 과정의 커리큘럼은 단순합니다. 일 년 동안 히브리어와 희랍어만 배우는 것입니다. 강의 계획이라고 부를 만한 것도 없습니다. 매일 하루에 히브리어 한 과, 그리스어 한 과를 배워나가는 것이 수업 진도입니다. 처음 며칠은 모두가 즐거워 보이고 활력도 넘쳐 보입니다. 수업 후에는 새로 사귄 친구들과 어울리고 종종 식사도 같이하면서 나름대로 낭만도 즐겨봅니다. 하지만 한 주가 지나고 두 주가 지나기 시작하면 학생들의 얼굴에 슬슬 어둠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조금씩 조금씩 시험에 대한 압박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나 희랍어 교재를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보통의 경우 한 과에서는 필요한 문법 외에도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단어들이 열다섯 개 내외로 소개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학생들이 어려움을 느끼기 시작하는 가장 큰 이유는, 쪽지 시험을 제외한 중요한 네 번의 시험 (1학기 중간/기말, 2학기 중간/기말) 범위가 언제나 1과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1학기 중간시험 범위가 1과부터 20과까지라고 한다면, 1학기 기말시험 범위는 1과부터 40과까지인 식입니다. 2학기에 들어서면 문법책과 더불어서 성경 본문을 함께 다루기 시작하는데, 저의 경우, 히브리어를 예로 들어보자면, 예과 과정 2학기 기말고사 때에는 판관기의 히브리어 본문 전체가 시험 범위였습니다. 본문의 어느 단락이 나오든 간에, 단어들을 분석하고 현대어로 해석해야 하는 것이지요.

 

본론으로 돌아가서, 이 예과 과정이 학생들에게 주었던 가장 큰 스트레스는, 위에서 언급한 대로, 이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기준이 되는 일정 점수 이상의 시험 성적을 받아야 하는 입니다. 실제로 적지 않는 학생들이 다양한 이유로 예과 과정을 통과하지 못하고 학교를 옮기거나 아예 전공을 바꾸게 된 경우들도 종종 보았습니다. 그래서 예과 과정 때는 선배들이 우스갯소리로 저희를 '비정규직'이라고 부르기도 했지요. 

 

짧은 지면을 통해 이루어지는 학생들과의 이 귀한 만남에서, 저의 힘들었던 그때 그 시절을 알아달라고 예과 시절의 이야기를 꺼낸 것이 아닙니다. 그 시절을 함께 돌아본 이유는, 지나간 시간을 보내며 제가 느꼈던 한 가지,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늘 제 삶에 있어서 하나의 중요한 가르침이 되어줄 작은 깨달음을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김동률의 노래 '출발'을 떠올려봅니다. 아주 멀리까지 가보고 싶고, 아주 높이까지 오르고 싶어하며 출발했던 노랫말 속의 주인공은, 그곳에 도착하기까지 어떠한 여정을 지나야 하는지를 그리고 어떠한 마음으로 그 여정을 걸어가야 하는지를 이어서 들려줍니다. 

"멍하니 앉아서 쉬기도 하고 가끔 길을 잃어도 서두르지 않는 법 [...] 나는 걸어가네 휘파람 불며 때로는 넘어져도 내 길을 걸어가네 [...] 끝없이 이어진 길을 천천히 걸어가네."

이 노랫말은 제가 지나왔던 예과 과정의 여정과 닮아있습니다. 매일 매일 늘어가는 단어를 외우기 위해 종이를 오려 단어 암기장을 만들면서 내가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길을 잃어버리기도 했고, 재미있게 공부하다가도 시험 성적이 잘 안 나와 좌절을 겪기도 했습니다. 무엇이 문제일까 고민하고 일상을 돌아보면서 다시금 깨닫고 확인하게 된 것은, 그러한 쉽지 않은 배움의 여정을 마쳐나가는 힘은 '천천히 그 길을 걸어가는 것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천천히, 매일매일 조금씩, 하지만 꾸준히 말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먼 곳을 바라보고 싶다는 바램을 갖고 출발한 여행에 있어서도,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천천히 그 길을 걸어가는 오늘인 것입니다. 

 

공부를 마치고 귀국을 준비하면서, 왠지 모르게 설레기도 하고 긴장되기도 하였습니다. 유학을 준비하던 때가 떠올라, '출발'을 다시금 꺼내어 들었습니다. 저의 상황이 바뀌어서 그런지 전에는 스쳐 지나쳤던, 노랫말의 마지막 부분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내가 자라고 정든 이 거리를 난 가끔 그리워하겠지만 이렇게 나는 떠나네 더 넓은 세상으로."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는 것이 높이까지 오른 것 혹은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리워하게 될 정든 그곳을 떠나 또 다른 출발을 한다는 뜻에서 노랫말의 이 마지막 소절은 제게 또 다른 용기를 주는 듯합니다. 새로운 출발을 하는 지금, 다시 한번 기억해봅니다. 이 새로운 여정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천천히 오늘 이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학생 여러분을 포함한 우리 모두는 각자의 꿈을 향한 여행의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저에게 주어진 소명은, 그 길을 함께 걸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여러분들보다 조금은 더 높이 올라가 본 것 일수도, 조금은 더 멀리 본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배우고 느꼈던 모든 것들이, 여러분들이 걸어가는 길에 작게나마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저 역시도 새로운 출발을 다짐해 봅니다. 학생 여러분들의 또 다른 출발인 오늘 하루를 하느님께서 축복해주시기를 바라며 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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