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의 진리는 무엇을 말하는가?
오늘날의 진리는 무엇을 말하는가?
  • 정병도
  • 승인 2024.02.09 2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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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참으로 다양성의 시대다. 지금 시대는 수많은 가치판단과 이해관계의 유불리에 따라 그 구성원들의 수만큼이나 형형색색으로 꾸며져 있다. 자연스럽게 과거 한 시대를 풍미한 ‘거대 담론’ 또는 동시대를 관통하는 ‘시대정신’처럼 한 사회를 규정한다는 것은 이제 낭만의 저편에서나 가능한 일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시대의 현실 속에서 우리는 진리를 말할 수 있을까?

 

‘진리, 어떤 모습인가?’
진리를 말하기 위해서는 그와 유사한 개념들 사이의 엄밀한 구분이 필요하다. 은연중에 유사한 개념들의 혼용이 간혹 풍부한 이해를 가져오기는 하지만, 대개는 본래의 가치를 오도하기 때문이다. 먼저 ‘사실’은 개인의 판단을 거친 하나의 정보다. 이는 절대적으로 주체에 의한 매개를 거쳐 형성되며, 특정한 대상에 관련된 사실이다. 따라서 사실은 내재적으로 자료가공에 따른 오해의 여지를 지닌다. ‘진실’은 사실들 가운데 사회의 역학 관계의 경합을 거쳐 해석학적 우선권을 지닌 내용이다. 

성 토마스는 진실을 도덕적 의미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그에 따르면 참된 것을 말하는 것은 선이고, 덕은 그것을 소유한 사람과 행위를 선하게 만들어 준다. 이러한 개념을 기반으로 바라보면 사회 안에서는 매번 새로운 사실들 사이에서 진실이 가려지지만, 사회를 존속시키고 발전시키기 위한 새로운 구조를 형성하기 위한 과정에서 대개 진실이 큰 영향력을 발휘함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진리’의 경우는 이와 다르다. 진리는 언제나 보편적이다. 왜냐하면 보편진리가 한 대상만을 지칭하여 그것을 참되다고 말한다면, 이는 ‘영속적 태도인 습성’이 아니라, 단지 그것의 대상이나 목적으로 전락해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리의 영역은 언제나 진실의 영역을 능가하고 또 아우르고 있다. 진리는 매번 변화하는 다양한 조건들 가운데에서 하나의 체계로 소급되지 않고 그 전체를 아우르며 새로운 가능성을 순간순간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준다. 안타까운 점은 오늘날 사람들은 저마다의 기준을 지니고 소위 ‘팩트체크’에만 열을 올린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궁극적 가치인 진리로의 이행은 요원한 일이고, 우리는무의미한 사실 판단에만 집착하게 될 수 밖에 없다.

 

진리, 어떻게 가능한가?
예로부터 지금까지 진리를 파악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본질직관을 통해 사물의 원인을 파악하는 인식론적 관점에서 진리를 파악했다. 성 토마스는 유명한 명제인 ‘사물과 지성의 일치’(Adaequatio rei et intellectus)로 진리를 이해했다. 그는 지성이 사물들에 일치하는 논리적 진리와 사물들이 지성에 일치하는 존재론적 진리 개념을 구분했을 뿐만 아니라, 인식을 통해 진리이자 존재 자체인 신(Deus)으로 나아가는 진리 개념을 제시했다.

이후 근대에 진리는 대상화되어 사상가들은 진리에 다다르는 방법론에만 초점을 맞춘다. 이때 관심은 '우리가 어떻게 고정적인 가치인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지'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근대의 기획은 그 목적을 달성하는 순간 종료되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현대에 이르러 G.가다머는 『진리와 방법』에서 새로운 해석학적 차원을 제시한다. 그는 진리가 전통 종교에서 상정하고 있는 '신'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선입견-편견과 별개의 노선이며, 역동적인 인간 경험에 근거를 두는 '이해의 사건 자체'라고 말한다. 따라서 그에게 진리는 파악되고, 낚아채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 일어나는 것이며 우리는 단지 그 진리에 참여하는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 결국, 진리는 우리가 선입견을 배제한다는 전제하에서만 그리고 시대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순환 속에서만 자신의 모습을 우리에게 드러낸다는 것이다. 가다머의 이러한 지적은 일면 정당하지만, 그의 관점에 따르면 계시로서의 진리는 오히려 우리의 해석을 방해하는듯한 모습을 보인다. 왜냐하면 그 해석학적 방법에는 피조물이 모조리 모든 것을 알 수 없다는 ‘겸손’이 분명하게 배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련의 흐름 안에서 우리는 오늘날의 진리에 대한 상대주의적 관점의 뿌리를 발견하게 된다.

 

진리, 상대적인가? 
성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회칙 『신앙과 이성』에서 “진리탐구가 언제나 항상 긍정적이고 확고한 결실을 내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28항) 진리는 한 사회의 역사적 맥락, 화법, 관심사 그리고 언어양식에 따라 각기 표현된다. 하지만 이것이 곧바로 절대적 진리 개념의 불가능성과 진리의 상대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진리는 제시되는 방식에서만 다양한 것이다. 진리는 여전히 하나이다. 그것은 온갖 다양한 진리의 측면들의 총합 그 이상이다. 진리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무제한적 지평의 근원으로서 우리에게 제시되고, 다양성의 기저에서 통합적인 관점을 우리에게 허락해주는 방식으로 드러난다. 따라서 피상적이거나 파편적인 이해 또는 개인의 주관적 이해관계의 관점에서 접근해서는 결코 진리에 다가갈 수 없다. 오히려 진리는 감추어진 완전성의 오롯한 자발적 개현과 더불어 수많은 가치의 층위 속에서 진리 추구를 향한 각자의 노력이 이뤄낸 소소한 결실을 통해서 비로소 우리에게 드러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진리를 찾는다고 하지만, 실상 진리는 이미 우리의 자유로운 사고, 인식의 근본 바탕에서 절대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진리, 인격적 온전함
오늘날 진리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어쩌면 진리는 우리가 그 절대적 가치를 다양성 안에서 발견해 주도록 초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온전한 진리를 아무런 방해 없이 그리고 모조리 발견하기란 사실 불가능하다. 따라서 오늘날 필요한 진리는 단순히 경험적이거나 철학적인 진리가 아니다. 또한 상대주의의 진격에 속수무책 당하는 무력한 것도 아닐 것이다. 오히려 오늘날 우리가 발견하고 또 중점을 두어야 하는 것은 ‘인격의 진리’(Personae Veritas)개념이다.(『신앙과 이성』, 32항) 이는 하나의 완전한 지식을 갖추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성 삼위의 사랑과 신뢰가 충만한 자기 증여의 역동성을 타인과의 인격적 만남 안에서 구현해 내는 방식으로 실현된다. 이러한 일은 오로지 진리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절대적이고 치환 불가능한 인격적 만남을 통해 이루어진다. 신앙의 관점을 공유하지 않는 이들에게 진리 개념이란 탐구와 분별 그리고 숙고와 식별의 과정을 거쳐야만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도 타당하다. 하지만 가장 근원적이고 절대적인 진리는 2천 년 전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세상에 오신 분이며, 오늘날 사람의 얼굴을 한 진리의 모습으로 여전히 우리 가운데 숨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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