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과 죽음이라는 신비 앞에서
고통과 죽음이라는 신비 앞에서
  • 김지은
  • 승인 2024.02.09 23:4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불가항력’(不可抗力)이라는 말이 있다. 사전적 의미로 ‘사람의 힘으로는 저항할 수 없는 힘’을 일컫는다. 삶을 살다 보면 불가항력적인 일들을 많이 만난다. 이는 때론 자연재해로, 때론 불의의 사고로 다가온다. 모두가 기억하듯 불과 몇 년 전 코로나19 팬데믹은 우리의 일상을 마비시켰다. 팬데믹으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는 가족, 친구들과 만날 수 없게 했으며, 심지어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보내는 장례식조차 온전히 함께 할 수 없었다. 불가항력이란 말이 표현하듯 인간의 이성으로 예측할 수 없고, 인간의 능력으로 막을 수 없는 일들이 우리의 삶 안에 항상 존재한다. 그리고 인간에게 있어 가장 불가항력적인 사건이란 바로 ‘죽음’이다. 무지와 고통과 죽음은 원죄의 결과이지만, ‘인류의 단일성’으로 말미암아 아담의 죄가 모든 후손에까지 전달된다는 것이 왠지 좀 억울하다. 게다가 고통과 죽음은 서로 뗄 수 없어서, 인간은 고통 속에서 죽음을 미리 맛보게 된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있어 고통과 죽음은 숙명이니 그저 침묵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

 

신학자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는 “인간의 형상이 갈기갈기 찢긴 그 시점과 장소에서 하느님의 복구 행위가 시작된다”고 말한다. 하느님의 모상과 비슷하게 창조된 인간의 형상은 원죄로 인해 손상되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죽음이라는 운명적 굴레를 반드시 거쳐야만 한다. 그러나 이 죽음을 그리스도께서 직접 겪으심으로써 새롭게 변화시키셨다. 하느님의 완전한 모상인 성자 그리스도는 죽을 수 없는 분이시지만, 우리와 같은 육신을 취하시고 고통받으셨으며 십자가 죽임을 당하셨다. 그리고 저승에 가시어 죽음 한 가운데서 부활하셨다. 그분은 고통과 죽음이라는 인간의 영역으로 들어오셔서 우리와 완전히 같아지심으로써 우리 인간성을 고양(高揚)시켜 주신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인성이 부서지고 깨진 곳으로 오셔서 다시 그 상처를 봉합하신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제 인간은 고통의 의미와 죽음의 실마리를 발견하게 된다. 생명의 주인이신 분이 죽음까지 취하시면서 고통과 죽음 앞에서 온갖 의문을 품은 인간에게 말씀하신다. 그리스도께서 바로 하느님의 말씀이자 응답이다. 이처럼 인간은 그리스도의 대속적(代贖的) 죽음을 통해 죄에서 해방되었으며, 구원에 이르게 된다.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지상 생활의 마침이요 새로운 삶으로 넘어가는 파스카적 전이(轉移)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죽음은 여전히 우리 삶에서 받아들이지 못하는 낯섦이다. 특히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구의 죽음은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기도 한다. 왜 사랑하는 사람이 불의의 사고로 죽음을 당해야 하는지, 왜 오래도록 병마와 싸우다 고통 중에 생을 마감해야 하는지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들이 머릿속에 가득하다. 그리고 이러한 일을 겪는 당사자와 그의 가족들에게 우리는 어떠한 위로와 안부의 말을 건네야 하는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는 분명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고통당하고 죽으셨는데, 왜 우리는 아직도 고통과 죽음을 겪어야 하는가? 이미 그분을 통해 도래한 영광만을 누릴 수는 없는 것인가?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없애 버릴 수 있는 고통과 죽음을 여전히 인간의 영역에 남겨두셨다. 인간은 고통과 죽음 앞에서 한없이 무력하며 고독한 시간을 마주한다. 이 시간은 온전히 자신을 하느님께 맡겨드려야만 하는 시간이다. 마치 첫 인간 아담이 이 세상에 창조되었을 때, 오로지 하느님과 둘 뿐이었던 것처럼, 하느님과의 단독적인 만남은 죽음이라는 문턱에서도 이어진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십자가상에서 이 고독한 시간을 겪으셨다. 하느님의 소리 없는 현존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 자신을 온전히 성부께 내어드리는 가장 자유로운 순종을 보여주신다. 인간의 힘이 다 빠져나가는 그 순간, 하느님의 권능은 더 커진다. 어쩌면 인간은 고통과 죽음을 통해 하느님과의 단독적인 만남 안에서 자신의 실존을 가장 명확하게 마주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 영역에는 아무도 끼어들 수 없는 고독한 심연이 있는 것이다. 죽음과 마주하는 인간은 오롯이 혼자서 그 고통의 의미를 이해하고 수용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하느님과의 고독한 만남 안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을 그분 앞에 내어놓는 ‘펜토스’(penthos)가 일어난다. 그리고 이 펜토스는 주님과 이웃과 새로운 관계로 나아가게 한다. 

 

펜토스는 영혼의 기쁜 탄식으로, 인간이 죄를 뉘우치며 흘리는 회개의 눈물이나 이웃에 대해 충분한 사랑을 하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내적 고통(슬픔)이라고 볼 수 있다. 펜토스는 우리의 시간과 공간의 지평을 열어놓는다. 현재의 고통은 과거의 고통받은 사람들과의 만남을 주선하고 또한 아직 고통받지 않은 미래의 사람들을 만나게 한다. 이로써 우리는 타인의 고통이 자신과 전혀 무관하지 않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함께 아파하는 마음을 가지면서 연대할 때, 우리는 주님의 수난과 죽음에 더욱 일치하게 된다. 인간에게 가장 큰 난제(難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 또한 그 고통의 중심으로 들어가야 한다. 

 

삶과 죽음이라는 운명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이시다. 그래서 고통은 신비로 주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것이 신비로 주어지는 것은 신비 자체가 하나로 수렴되는 일관성 안에서는 도저히 설명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우리가 예측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뻔한 일들을 펼쳐놓지 않으신다. 오히려 하느님은 역설적인 사건들을 통해 우리를 당신 구원의 신비로 부르시고, 우리의 가장 연약한 본성을 통해 완전에 이르도록 이끄신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인간의 방식이 아닌 당신의 방식으로 우리를 부르신다. 이 부르심에는 신비로 주어지는 고통이 있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의 삶은 무한한 하느님의 신비 앞에서 자기를 비우는 필수적인 과정을 동반하며, 또 자신을 비우는 과정을 통해서만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다. 인간은 고통과 죽음 앞에서 자신의 부족한 믿음과 어리석음을 넘어 하느님께 무한한 희망을 품는 순간, 그것이 은총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신비 안으로 서서히 들어갈 때 하느님께서 주시는 무한한 은총을 체험하게 된다. 또한 고통 중에 하느님께서 우리와 만나시는 그때, 유한한 존재인 우리의 불완전함이 그분 안에서 극복되고, 구원의 은총이 지금, 현재 자기 자신과 주위 사람들에게 생생하게 재현됨을 느낀다. 이렇듯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을 만나고 세상을 만난다. 하느님과의 한 인간의 수직적인 만남이 이제 다른 이웃들과의 수평적인 만남으로 확장되어 나가게 되는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