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장소, 장소적 인간
인간의 장소, 장소적 인간
  • 정병도
  • 승인 2024.02.09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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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1. 공간과 장소
‘핫플과 0리단길’ 탄생의 기원은 어디인가? 사회적 존재인 인간에게 구별짓기는 필수적이다. P.부르디외는 한 인간에게 어떤 사회적 행위보다도 타인과의 구별이 인간의 본질적인 움직임이라고 지적한다. 실제 다양한 차원에서 ‘나와 너’의 구별을 위한 상징체계가 작동한다. ‘공간’은 구별을 위한 하나의 거시적인 도구이다. 이런 점에서 자기만의 공간은 무언가를 숨기기 위한 은폐의 영역이 아니라, 독립된 자의식을 확인하는 본질의 영역이고 자율의 영역이다. 

이와 더불어 ‘장소’개념도 있다. 장소란, 하나의 사건이 일어나는 곳으로서 단순한 물리적 공간에 ‘의미’가 추가로 부여된 곳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 공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역동적 활동이 그 장소의 자유로운 성장과 변화를 가능하게 만들어준다. 동시에 기능적으로 고정된 장소는 역으로 그 범위 안의 개인에게 영향을 미친다. 이렇게 볼 때, 특정한 장소는 개인의 욕망을 자극하고, 이 욕망이 충족되는 방식에 따라 거듭 장소의 의미도 변화한다. 곧, 장소는 개인과 개인, 개인과 사회간의 비가시적인 역동성이고, 존재의 지평 역할을 수행한다. 

 

2. 장소의 변천 
역사 안의 개인은 장소형성의 역사 내에 자리한 주체와 동일하다. 이는 개간이나 건축이라는 물리적 의미에서의 장소뿐만 아니라 개념적 의미에서의 장소도 의미한다. 신화적 공간이라는 의미를 지닌 태초의 카오스를 넘어 가장 먼저 장소를 규정한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였다. 그에 의하면, 하나의 사물은 그가 지닌 외연만큼의 현실적 장소인 토포스를 할당받는다. 중세기에 들어 신이 지배하는 장소는 근대에 이르러 객관성을 확보하게 된다. 데카르트는 그 유명한 연장적 실체 개념을 통해 장소를 형이상학적 차원에서 물질적 차원으로 끌어내렸다. 칸트는 이러한 장소를 다시 선험과 순수직관의 영역에서의 공간으로 경계지어버렸다. 

장소의 가치는 현상학의 방법론을 통해 회복되었다. 특정한 사물에 초점을 맞추어 대상으로 삼는데서 출발하는 현상학의 지각방법식은 예외없이 대상을 둘러싼 주변부 곧, 지평을 수반한다. 지평은 특정 대상에 은밀하고 잠정적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이 지평 위에 속한 대상들과 하나의 대상은 유리될 수 없는 상호관계를 형성해 나가며 초점 맞춰진 대상의 의미를 형성한다. 이러한 지각 매커니즘은 특정 사물을 넘어 개인의 의식, 심리의 전 영역에도 적용된다. 장소 역시 마찬가지다. 이제 장소는 단순한 공간의 의미를 넘어선, 그곳에 속한 개인을 장소적 인간으로 성장시켜 나가는 역동적인 장(場)이 된다. 

 

3. 신앙과 장소 
신앙인에게 장소개념은 어떤 것일까? 기본적으로 신앙인의 장소는 쉽게 방문할 수 있는 성당이나 성지 또는 성체조배실로 이해되는 것은 당연한 반응이다. 하지만 이 장소개념을 보다 근원적이고 포괄적으로 이해하여 우리 ‘역사 전체’로 확장시켜 본다면 그 심오한 의미가 드러나게 된다. 성서는 하느님의 구원장소라는 분명한 의미규정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장소를 이해한다. 빈 땅에 ‘말씀’을 부여함으로써 이루어진 하느님의 창조된 세상(창세1,1)은 그 시작에서부터 자연스럽게 신앙적 맥락을 지니게 된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땅’이라는 장소는 ‘하느님’이라는 절대적 가치가 녹아있는 약속의 장소였고 ‘영원한 생명’의 장소로 이해되었다. 이윽고 그들은 그 의미를 가시화시키기 위하여 성전을 지었고, 열렬한 신앙활동을 통해 그 가치를 더했다. 

모든 인간에게는 개인의 삶에 따라 부여된 장소들이 있다. 사회활동과 경제활동을 영위하는 장소, 지적탐구를 위한 장소가 있으며, 오늘날 특별히 강조되는 개인의 온전한 안식을 위한 놀이장소(Spielraum)도 존재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신앙인의 장소를 세상과 역사 전체로 확장시켜볼 때, 우리가 형성할 수 있는 것은 신앙장소(Glaubensort)개념이다. 이는 자신의 역사 안에서 하느님과 자유로이 만나고, 창조적 열정을 향유하는 모든 인간이 자신의 본래성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4. 신앙인, 장소적 인간
한편으로, 신앙인 자체가 하나의 고유한 신앙장소이다. M.하이데거는 세상에 피투된(geworfen)인간은 필연적으로 우연성을 지니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주어진 자유를 통해 장소를 형성하며, 이 장소를 통해 주어진 진리가 자유로운 삶을 보장해준다고 말한다. 우리 각자를 이러한 실존적 관점에서 바라볼 때, 개인의 역사는 하느님의 구원사건이 일어나는 장소적 존재라는 의미를 지닌다. 동시에 신앙적 관점에서 하나의 장소란 특정한 사건이 발생한 곳이고, 그것을 영속적으로 기념하고 기억하는 곳이며, 동시에 약속의 충만한 실현을 기다리는 곳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파스카 이후 과거의 물리적 성전은 그리스도의 몸에 결합된 지체인 우리 자신이 된다. 즉, 신앙인은 그 자체로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역동성 안에서 새로운 의미를 확보하게 되는 장소적 인간으로 승화된다.  

다시 첫 물음으로 되돌아가본다. 우리가 찾아야 할 핫플은 SNS 업로드와 타인과의 구별을 위해 모두가 방문하고 싶어하는 공간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지금 그리고 여기’인 장소적 인간의 삶의 자리가 영혼구원을 위해 머물러야 할 장소임을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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