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고했어, 오늘도
수고했어, 오늘도
  • 윤현
  • 승인 2024.02.20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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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올해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2023년을 맞이하면서 세웠던 계획이 있으셨나요? 우리는 새해가 되면 올해는 꼭 금연이나 금주, 다이어트를 하겠다는 굳은 다짐을 하곤 합니다. 요즘은 바디 프로필, 오운완(“오늘 운동 완료”), 다이어리 작성, 미라클 모닝같이 새로운 형태의 계획들도 등장했습니다. 굳이 새해가 아니더라도 스스로 다짐한 목표를 달성한 지인의 모습이나 여러 가지 동기부여에 자극을 받아 나름의 계획을 세우기도 합니다. 이렇듯 우리는 어떠한 시간 혹은 체험을 기점으로 목표를 설정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목표를 설정하는 만큼 자주 실패하기도 합니다. 또는 올 초에 세웠던 목표가 어느새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기도 합니다. 망각의 강을 건너버린 우리의 위대하고도 웅장했었던 그 목표를 생각하노라면, 현재의 내 모습은 초라해 보입니다. 한 해를 맞이하며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한 해를 보내겠다는 불타오르던 전의는 차갑게 식어, 그 흔적은 온갖 스티커와 형형색색의 볼펜으로 정성스럽게 작성된 다이어리 앞부분에만 남아있는 건 아닌지요. 이 잔까지만 마시고, 한 대만 피고 끊겠다던 술과 담배는 뽀로로처럼 오늘도 나의 친구로 남아있는 건 아닌지요. 

 

1. 삶과 시간 

이러한 실패의 경험은 우리의 한계를 직면하는 순간이기에 좌절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어쩔 수 없었다고, 다음에 다시 도전하면 된다고 스스로를 위로하지만, 씁쓸한 뒷맛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계속되는 실패의 경험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합니다. 그러다 보면 우리는 자연스레 삶에 대한 환멸과 인간 존재의 무상함을 절감하게 됩니다. 누군가는 이러한 고통 앞에서 삼재(三災)나 전생(前生)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어쩌면 자신의 실패를 감당하지 못하는 인간이 자신의 실존 밖에서 그 원인을 찾으려는 절박한 호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실패 앞에서는 조금의 내성도 갖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시간 위에 놓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시간은 유일회적이며 비가역적입니다. 이러한 시간의 특성은 우리의 삶에도 고스란히 적용됩니다. 우리는 결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실수를 만회할 수 없다는 사실에 우리의 절망감은 가중됩니다. 물리학의 ‘열역학 제2 법칙’은 시간과 삶의 유일회성과 비가역성을 잘 보여줍니다. 이 법칙에 따르면 엔트로피는 계속해서 증가합니다. 즉, 우리가 사는 세상의 무질서함은 늘어가고 시간은 돌이킬 수 없이 뻗어나갑니다. 시간은 화살처럼 날아갈 뿐 결코 돌아올 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양자역학은 양자 영역에서는 엔트로피가 감소하여 시간의 역전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양자의 세계는 언제나 ‘우연’과 ‘경향성’에 의존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엔트로피가 역전될 수 있다는 양자역학의 주장은 오히려 우리에게 공허함만을 안겨줄 뿐입니다.  

한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고달픈 우리 삶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시공간은 중력의 영향을 받습니다. 중력에 따라 시공간의 곡률(曲率)이 생겨 시간의 흐름은 변화합니다. 마치 영화 인터스텔라의 한 장면처럼 말이죠. 우리는 살아가면서 막중한 책임을 맡기도 하고, 무거운 짐을 짊어지기도 합니다. 이러한 삶의 무게는 중력과 같이 작용하여 시간에 왜곡을 발생시킵니다. 일주일의 체감이 워어얼, 화아, 수, 목, 금, 퇼(토+일)이라는 유머러스한 이야기에도 왜인지 모를 자조가 느껴지는 것은 이러한 시간의 왜곡이 그리 달갑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흘러가는 시간 안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해야만 하는 존재에 불과한 것일까요? 만일 그렇다면 우리에게 시간과 삶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2. 현재로서의 삶 

서방교회의 위대한 신학자인 성 아우구스티누스(354-430)는 시간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말할 때 이를 아는 것이 사실이요 남한테 들을 적에도 알아듣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다면 도대체 시간이 무엇입니까? 아무도 묻는 이가 없으면 아는 듯하다가도 막상 묻는 이에게 설명하려 들자면 말문이 막히고 맙니다” (『고백록』, Ⅺ, 14) 성인의 말처럼 우리에게 시간은 일종의 신비와도 같습니다. 과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미래는 아직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현재를 어느 한 지점에 고정할 수 없습니다. 지금도 현재는 과거로 흩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인은 현재가 결국에는 과거로 또 미래로 사라져 버린다면, 현재는 존재가 아니라 비존재로의 흐름일 뿐이라고 지적합니다. 이러한 시간의 패러독스는 시간 위에 놓인 우리를 당황스럽게 합니다. 성인은 시간의 패러독스를 극복하기 위해 과거, 현재, 미래를 독립적으로 보는 기존의 시각을 거부하고 시간을 영혼에 내면화합니다. 이 과정에서 현재의 가치는 강조됩니다. 우선 성인은 과거, 현재, 미래에 각각 기억, 직관, 기대라는 특성을 부여 합니다. 이 특성은 영혼의 지향성에서 비롯되는데, 이제 과거에 대한 기억과 미래에 대한 기대는 직관을 통해 현재로서 경험됩니다. 예를 들어 과거의 사건은 현재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거를 회상하며, 그 과거의 기억을 현재에서 체험합니다. 또한, 미래의 사건은 아직 존재하지 않지만, 우리는 그것을 현재에서 예견하고 기대합니다. 성인은 우리가 과거와 미래를 현재로서 체험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우리의 영혼이 영원을 지향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렇듯 성인은 과거, 현재, 미래로 분산되는 시간의 결함을 영원과의 관계를 통해 극복하고자 합니다. 성인에게 시간은 인간의 실존을 규정하는 근본 조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 분산된 시간의 패러독스를 체험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시간 위에 놓인 인간의 실존은 미궁에 빠집니다. 그러나 그 시간이 영원을 지향할 때, 곧 비존재로 흘러버리는 시간을 현재에서 체험할 때 인간의 실존이 규명될 수 있습니다.  

 

3. 삶에의 희망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말처럼 현재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현재를 살아가기 때문이죠. 현재는 신학의 분과 중 하나인 종말론에서도 중요하게 다뤄집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질문을 제기하게 됩니다. 만약 세상에 종말이 있다고 할지라도 종말이 나의 죽음 이후 벌어진다면, 나의 현재와 종말은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답은 “현재 나의 선택은 종말에 맞게 될 나의 상황을 반영한다.”입니다. 즉, 현재 우리의 선택은 영원의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현재와 종말의 관계를 “깨어 있어라.”라는 구절로 표현합니다. 이러한 삶의 자세를 신학적으로는 종말론적인 삶이라고 합니다.  

이렇듯 우리는 현재를 살아가면서 언제나 종말을 지향하면서 살아갑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시간 안에 살아가면서 영원, 곧 구원을 희망합니다. 이것이 시간 위에 놓인 인간 실존의 종말론적 의미입니다. 한편으로 인간의 구원은 ‘이미’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자가 사람이 되신 사건, 곧 육화(incarnatio)에서부터 부활에 이르는 그분의 십자가 사건(pascha)은 그리스도의 구원 업적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업적에 참여하는 것은 종말에 있을 구원을 선취(先取)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구원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두 번째 오심, 곧 재림(parousia) 때 비로소 완성됩니다. 그런데 ‘이미’와 ‘아직’이라는 긴장 관계에 있는 인간의 실존은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이 지적했던 시간의 패러독스를 연상시키는 것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업적이 이뤄졌어도 그것은 ‘이미’ 벌어진 과거의 사건이며, 그분의 재림은 장차 도래할 미래의 사건으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깨어 있어라”라는 종말론적인 삶으로의 초대에도 우리가 쉽사리 응답하기 어려운 것은 여전히 우리는 현재를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을 경험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나의 찬란했던 과거와 내가 꿈꾸는 미래에 비해 현재의 나는 초라해 보입니다. 오히려 내가 저질렀던 실수를 만회할 수 없다는 생각과 나의 기대가 부질없다는 회의에 현재 나의 고통은 더욱 깊어집니다. 영원을 지향하라는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말씀, “Carpe diem”,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금은 지금이라는 격언을 계속해서 되새겨도 여전히 우리의 삶은 녹록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희망 섞인 구호가 지쳐 쓰러진 나를 조롱하는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미’와 ‘아직’ 긴장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우리에게 요구되는 종말론적인 삶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베네딕토 16세 교황으로 잘 알려진 요제프 라칭거(1927-2022)는 자신의 저서인 『종말론』에서 ‘이미’와 ‘아직’ 사이의 틈을 메울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 겟세마니에서 고뇌에 싸여 기도하실 때, 그분의 땀은 핏방울처럼 되어 땅에 떨어졌습니다. (루카 22,44) 또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기 전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마르 15,34) 라고 외치며 절규하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평온하고 초연한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누구보다 처절하게 번민하시고 고통에 몸부림치십니다. 그런데 그 피와 절규로 얼룩진 예수님의 십자가가 ‘이미’와 ‘아직’을 메우는 도구가 되어 우리 앞에 나타납니다. 우리가 삶에서 겪는 고통은 결코 미화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때때로 고통을 너무나도 손쉽게 미화합니다. 이는 어쩌면 고통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승화하는 것이 아니라, 마주할 수 없는 고통을 그저 외면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서투르고 부족했던 그때 나의 모습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서 그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철저히 무시하고 회피합니다. 하지만 숨어있던 고통은 불현듯 찾아와 나를 잠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당신의 십자가로 위로하십니다. 그분께서는 피 흘리시며 우리의 피를 닦아 주십니다. 피와 눈물로 얼룩진 얼굴로 오열하는 우리를 다독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우리의 희망이요, 구원입니다. 결국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고통과 실패의 쓰라림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포함한 삶의 모든 조건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거듭된 실패와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오히려 직면하는 것이야말로 진정 현재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위로를 얻어 또다시 하루를 살고, 살아내야만 합니다.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올 한 해를 살아내신 여러분들 모두 고생 많으셨습니다. 여러분의 오늘을 응원하고, 그 오늘을 당당히 마주하실 수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내 삶은 때론 불행했고 때론 행복했습니다. 삶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지만 그럼에도 살아서 좋았습니다. 새벽의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부터 부는 달큰한 바람, 해 질 무렵 우러나는 노을의 냄새, 어느 하루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지금 삶이 힘든 당신,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당신은 이 모든 걸 매일 주릴 자격이 있습니다. 대단하지 않은 하루가 지나고 또 별거 아닌 하루가 온다 해도 인생은 살 가치가 있습니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JTBC 드라마, 눈이 부시게, 12화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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