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사랑, 인간의 결단
하느님 사랑, 인간의 결단
  • 이학주
  • 승인 2024.02.20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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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심의 여정에서

 

사제 성소여야만 하나요? 

어느새 한 해가 끝나가고 추운 겨울이 시작되었습니다. 곧 있으면 제가 신학교에 들어온 지도 어느덧 만 5년을 채우게 됩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 수 있는 그 시간 동안 많은 사람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그중에서 제가 가장 많이 들은 질문 하나를 꼽아보라고 한다면 그것은, “학사님은 왜 신학교에 가게 되셨나요?”라는 물음입니다. 이 질문을 마주할 때마다 저는 입학의 순간보다는 제가 왜 아직 남아있는지에 대해 설명하고 싶다고 답하고는 했습니다. 스스로 생각했을 때 입학한 동기 자체가 그리 큰 임팩트가 없다고 여겼나 봅니다. 특별한 사건을 통한 체험이 아니라 여러 성가를 들으며 마음이 동하다가 한순간 그 동함이 밀려와서 흘러오듯이, 홀린 듯이 들어왔기에 그런 마음이 묘하게 들고는 했습니다. 

각설하고, 결론적으로 이 질문에 대해 저는 학교에 남을 이유를 학교 안에서 하나하나 찾아가고 있다고 답했습니다. 매년 자신의 한계나 외부의 영향으로 인해 사제 성소에 대한 회의나 불안이 들 때, 항상 새로운 깨달음이나 체험이 스스로를 쇄신하고 신학교에 남아있게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올해도 어김없이 성소의 여정에서 새로운 문제 제기가 저에게 제시됐습니다. 이는 제 성소 동기를 다시 한번 돌아보게 했습니다. 누군가 저에게 “왜 아직 신학교에 남아있나요?”라고 물어본다면 그 전까지의 저는 “교회를 위해 일하고 싶어서 그렇습니다.”라고 하거나, “하느님을 사랑하고 닮고 싶어서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나요? 이러한 답의 근저에는 마치 사제 성소가 아니라면 교회를 위해 일을 할 수 없거나 하느님을 사랑하고 닮을 수 없다는 전제가 있는 듯하니 말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에 대한 의문을 해소하기를 계속 미뤄왔습니다. ‘내가 여기에 있다는 것 자체가 하느님께서 나를 사제 성소로 불렀다는 것이겠지.’라는 두루뭉술하고 막연한 방어막을 치면서 말이죠. 

 

피하는 선택과 향하는 선택 

하지만 이 막연한 방어막과 정교하지 못한 성소 동기는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이 꼭 사제 성소가 아니어도 괜찮다’라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게 될 때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자비를 아주 조금이나마 느끼니 그에 따라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 누구도 사제 성소를 강제한 적이 없다는 것, 심지어 하느님마저도 당신 자녀가 사랑하며 살 수 있는 삶, 그리스도인으로서 행복하고 올바르게 살 수 있는 삶을 선택한다면 오히려 이를 축복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저에게 남은 것은 그동안 외면해온 질문이었습니다. ‘나에게는 어떤 삶이 사랑하는 삶인가?’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어떤 삶이 내가 진심으로 동의하며 참으로 행복 안에서 사랑할 수 있는 삶인가?’입니다. 아직 신학생이고 아무런 공적 서원도 하지 않았기에 더 솔직한 자세로 할 수 있는 고민이었습니다. 

기도 안에서의 여러 체험과 지도 신부님의 도움을 받아 본인이 하느님께서 사제 성소의 길로 가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식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인지한 것과는 무관하게, 사제 성소를 향해 마음이 압도적으로 동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많은 이들은 자신이 하느님을 직접 뵙거나 그에 준하는 신비 현상을 직접 눈으로 보면 하느님을 더 잘 믿고 그 뜻을 잘 따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하지만 저는 예수님의 발현을 본다 해도 그 뜻을 거부할 수 있다고, 그리고 그런 행동은 생각보다 쉽게 일어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하느님의 뜻 앞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와 선택, 그리고 책임에 대해 적나라하고도 무겁게 느끼니 그런 확신이 더해진 것 같습니다. 결국 마음의 문제인 것입니다. 

이 시간 동안 저에게 많은 도움이 있었지만, 그중 손에 꼽는 도움은 제가 정말 좋아하는 어떤 분이 해주신 말씀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네가 구체적으로 그분 말을 잘 듣는 것보다도, 네가 사랑하며 살기를 바라신다.” 어쩌면 그동안 저를 신학생으로서 살아가게 했던 주된 동력원은 두려움과 의무감이 아니었는지 자문해봅니다. 물론 사랑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겠지요. 하지만 고등학교 시절 이후로 줄곧 ‘모범생’으로 살아오고 그렇게 살고자 노력했던 저를 지배적으로 움직였던 것은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마음보다는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끝은 쉽게 무미건조해지는 삶과 자기 학대뿐이었습니다. 

어쨌건 제가 들은 저 말씀은 하느님께서 누군가를 두고 그가 사제의 길을 가기를 원하신다고 해도 이에 앞서 그 존재가 참으로 사랑 안에서 살기를 더 원하신다는 생각을 더 견고히 해주었습니다. 제가 한층 더 자유롭게 결정할 힘을 준 것입니다. 그 이후로 저는 결단을 내려야 할 때 두려운 것을 피하는 결정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을 선택하는 결정을 하기를 청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저의 기도에 ‘제가 사랑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라는 내용이 추가되었습니다. 물론 그 사랑은 궁극적으로 선, 하느님을 향할 때만 완전함을 항상 잊지 않아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사랑하는 사람,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 

그렇다면 그 사랑은 무엇을 향해야 할까요? 추상적인 선을 향하면 그만일까요? 돌아보면 저는 지난 시간 동안 얼마 안 되는 사랑을 할 때조차도 하느님이라는 인격체를 향한 사랑보다는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은총과 위로에 대한 사랑, 직무에 대한 사랑에 잠긴 시간이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마치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이 『신애론』을 통해 이야기한 “눈은 하느님을 떠나 그대의 기도로 향”하(『하느님을 찾는 이들에게』, 9장)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하느님 자체에 대한 인격적 사랑은 오히려 그분께서 얼마나 요구하실지 모른다는 두려움, 그리고 수많은 유혹과 감정들 앞에서 ‘나중에’를 외치며 스스로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억제하곤 했습니다. 

결국 책임감이나 직무에 대한 사랑, 심지어는 이웃에 대한 사랑까지도 불특정 다수에 대한 것이라면 이는 하나의 구체적 인격을 향한 사랑과 그에 대한 갈구를 감정적으로 능가할 수 없음이 자명해 보입니다.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억지로 전자만을 선택한다면 그 사람의 정신은 지속적으로 상처받으며 병들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사실 전자에는 두려움과 의무감이 행동의 원동력이 될 여지가 훨씬 많습니다. 두려움은 주로 타인의 평가와 관련된 것이겠죠. 반면 후자는 사랑 그 자체가 행동의 원동력이 될 여지가 더 많습니다. 누군가를 온전히 사랑한다는 것이 그 사람에 대한 온전한 신뢰를 전제한다면 더욱 그러합니다. 

그리고 한 인격을 사랑하게 되면 그의 의지까지도 사랑하게 되기 마련입니다. 그 사람의 의지를 따르는 행동은 그 사람이 무서워서, 혹은 어떠한 의무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기인한 자발적인 행동이 됩니다. 그래서 그 의지를 따르는 일 자체가 행복이 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랑에 대해 계산적으로 접근하는 현대사회에서는 그러한 모습을 보기 쉽지 않지만) 사랑하는 인격에게 자신을 투신한 사람들이 그 대상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원하고 기뻐하며 행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두려운 것은 피하되 선택은 사랑하는 것을 

우리에게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소명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소명 앞에서 선택을 할 때 두려워하는 것으로부터 도망가려는 내면의 움직임에 지배되고, 이를 합리화하며 자신에게 최면을 거는 행위는 바람직하지 않아 보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 안에서 사랑을 쫓아내고 자신을 피폐하게 만들지도 모릅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도 마음이 온전히 동의해서 선으로 나아가는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뿐만 아니라, [...] 자신의 감각적 요구로도 선으로 나아갈 때 비로소 도덕적 완성을 이룬다.” (1770항) “도덕적 선이 완성되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의지뿐만 아니라 자신의 ‘마음’으로도 선으로 나아갈 때이다.” (1775항) 가톨릭교회의 손꼽히는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도 인간의 행위에 있어서 감정의 강력한 영향력을 인정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신학대전』에서 선을 향하는 감각적 욕구를 움직이는 근본적 원인은 바로 해당 대상에 대한 ‘사랑’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물론 두려움이라는 감정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에게 악이 되는 것을 피하도록 도와줍니다. 하지만 우리가 ‘더 선한 것’을 선택하기를 원한다면 두려움의 대상을 회피하기보다는 사랑하는 대상을 선택하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결론지을 수 있겠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는 사람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와 비슷합니다. 우리가 타인이 원하는 것을 하게 되는 가장 바람직한 과정은 그 사람 자체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고, 그로 인해 그의 합리적인 의도에 감정을 포함한 전인적 동의를 거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을 보다 더 인격적으로 만나고, 하느님의 사랑을 실감하고 난 뒤 그 사랑 안에 젖어 들고 그분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 우선이어야 합니다. 그 후 그분의 조명 안에서 우리의 참된 소명을 인식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핵심적 특성인 자유를 활용하여 응답할 때 진정으로 선이 실현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지상에서의 인간은 사랑에 있어서 불완전한 존재이므로 어떤 선택을 하든 여전히 우리는 두려움을 느끼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사랑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음을 항상 느끼게 되겠지요. 하지만 무언가를 사랑하고자 하는 의지 자체도 결국 사랑한다는 것에 포함되지 않을까요? 하느님을 사랑하게 해달라고 청하는 행위도 이미 하느님을 사랑하는 첫 단계에 해당할 것입니다. 이 청원을 드리고자 하는 의지를 하느님이 넣어주셨을 것임이 분명하기에 이도 은총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 의지를 나타내는 라틴어 voluntas의 부차적 의미가 애정과 호의이기도 하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합니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도 ‘지금 내가 올바르게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라는 걱정조차 사랑하는 행위에 포함된다고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사랑하지 않는다면, 사랑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걱정 따위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사랑 때문에 그 선택을 하는가?’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 때문에 우리가 더욱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을 때,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안토니우스가 “나는 이제 더 이상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분을 사랑하오.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내기’ (1요한 4,18) 때문이지요.”라는 말의 뜻을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앞날이 어찌 될지 모릅니다. 하느님의 모든 부르심은 검증 끝에 합격 여부가 결정되고 끝이 아니라 생생한 삶 속 관계를 통해 완성시켜 나가는 것이기 때문이죠. 다만 부르신 분이 그동안 주신 사랑과 위로, 힘을 받은 체험을 바탕으로 한 신뢰로써 나아갈 뿐입니다. 메마를 때도 있겠지만 언제나 함께하시고 사랑해 주시는 하느님과 함께, 그분을 사랑하며 믿고 나갈 뿐입니다. 어느 길을 선택하든 뒤를 돌아보는 순간이 올 것입니다. 어느 선택이건 간에 무언가를, 정말 소중히 여기는 것도 포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여정에서 진심으로, 간절히 하느님께 마음을 열고 도움을 청한다면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우리를 진실로 바른길, 참된 사랑의 길로 인도해 주시고 도와주십니다. 우리가 사랑하도록 진정으로 불리움 받은 바로 그 대상을 사랑하게끔 말이죠. 그 사랑 안에서 모두가 궁극적인 행복, ‘나의’ ‘참된’ 행복을 알아보고 선택할 수 있기를 염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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