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 칼럼] 사람이 그리운 밤에...
[교수 칼럼] 사람이 그리운 밤에...
  • 송정호 알베르토 신부
  • 승인 2024.02.22 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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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심의 여정에서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나는 어딘가로 이동할 때 대중교통을, 특히 지하철을 자주 이용한다. 이동할 때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하여 보통은 음악이나 라디오를 듣곤 하는데, 이것 말고 그 시간을 보내는 나만의 특별한 방법이 있다. 그것은 바로 지하철 속의 ‘사람들 구경하기’이다. 지하철은 기본적으로 서민들의 이동수단이기에 TV나 인스타그램에서 접하는 꾸며진 사람들의 모습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책이나 신문을 보며 지하철에서 시간을 보내던 20년 전과는 달리, 지금은 귀에 무엇인가를 꽂은 채 눈은 핸드폰을 바라보는 이들이 많지만 그 안에 담겨져 있는 ‘사람’이라는 공통된 모습은 변하지 않았음을 느낀다.  

 

아침 일찍, 출근시간에 지하철을 타게 되면 그 안의 사람들은 정말 ‘전쟁터로 향하는 병사’들 같다. 오늘 하루도 짊어져야 하는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우리 식으로 말하면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정신없이 일터로 향하는 그들의 모습은 ‘나는 과연 내 삶을 얼마나 충실히 살고 있나?’라는 반성을 하게 한다. 손을 잡고 사랑스러운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연인들의 모습이나, 어린 자녀를 바라보며 행복해하는 부모의 모습을 보며 나와는 다른 길을 걷는 이들의 삶의 단면을 바라본다. 1호선에는 유독 어르신들이 많이 탄다. 귀가 잘 들리지 않으셔서 그런지 큰 소리로 대화하는 분들도 많고 전화 통화도 서슴없이 하시는 분들도 있다. 내 몸이 피곤할 때면 그들의 목소리가 불편하게 다가오기도 하지만, 컨디션이 좋을 때는 그 정돈되지 않은 왁자지껄함 속에서 인간미 넘치는 재래시장에 온 것 같은 ‘정겨움’을 느낀다. 술 한 잔 걸치고 돌아오는 늦은 저녁에는 나와 비슷하게 술자리를 마치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이들을 바라본다. 술기운에 꾸벅꾸벅 조는 모습을 바라보며 ‘저 분­ 속에는 어떤 삶의 이야기가 담겨있을까?’ 생각해본다. 

로마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많은 분들이 ‘로마에서 무엇이 힘들었느냐?’고 묻곤 하였다. 한국 음식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 언어의 한계, 외국인으로서 감내해야만 했던 차별 등도 있겠지만 돌이켜 보면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사람에 대한 관심이 약해지며 메말라 가는 나 자신을 마주하는 것’이었다. 내 주변의 ‘가난한 이들, 약한 이들을 외면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사제이기 이전에 그리스도인의 도리임을 머리로는 알지만, 지금 당장 내 삶이 팍팍하기에 ‘내가 가장 약자이고, 내가 가장 가난한 사람이다’라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다른 사람들을 의식적으로 외면하였다. 처음에는 그러한 ‘내 모습’이 스스로 불편하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내 눈앞에 있는 ‘그들의 존재’가 나에게 ‘불편함’으로 다가오는 것을 느꼈고, 더 메말라지기 전에 빨리 학업을 마치고 귀국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한 빅데이터 전문가는 오늘날 한국 사회를 ‘핵개인’ 사회라 분석하였다. 여기서 ‘핵개인’이란 더 이상 기존의 권위나 가치에 얽매이지 않으며 기술과 정보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독립된 주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소위 말하던 권위주의 시대, 가정의 가치를 중시하던 핵가족의 시대를 넘어서 개개인이 홀로 서는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고 전망하였다 (참조: 송길영, 시대예보-핵개인의 시대, 교보문고, 2023).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분석하며 ‘요즘의 문화와 시대정서가 어떠하다’고 말하는 것이었지만 ‘한 주체로서의 개인’이 강조되는 것이 ‘나’만 강조되거나, 혹은 ‘나의 필요성’만 강조되는 것으로 귀결되지는 않을지 걱정되었다. ‘타인에게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그리하여 ‘타인의 말이나 행동에 상처받지 않으며 타인과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하지 않는 것’을 소위 ‘쿨(cool)하다’라고 여긴다면 그 쿨(cool)함 때문에 내 자신이 먼저 차가워지고 건조해질지도 모른다.  

우리가 하는 신학은 신에 대하여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리고 그 신은,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이 땅에 내려와 직접 인간이 되시어 우리와 함께 사셨다’. 우리가 연구하려는 하느님이 인간을 향해 있기에, 그 신을 조금이나마 우리의 이성으로 알려면 우리는 인간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그러하기에 ‘나와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것’ 어쩌면 그것이 신학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신학생 시절, 한 은사 신부님은 자신만의 성소(聖召) 식별 기준으로 ‘사람에 대한 연민의 유무’를 말씀하셨다. 겉으로 보기에는 부족하고 때로는 말썽도 피우지만 사람에 대한 따뜻한 마음이 있는 사람이, 외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고 괜찮아 보이지만 타인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보다 ‘더 사제직에 적합하다’고 말씀하셨다. 또 다른 신부님은 ‘하늘나라 입장권은 단체 티켓 밖에 없다’고 말씀하시며 함께 살아가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같은 이야기를 조금 더 신학적으로 표현하면 ‘하느님은 인간을 개별적으로 구원하시지 않고,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이루는 깊은 연대로 하나 된 백성으로서 구원하신다’ (참조: 교회헌장 9항). 세상이 아무리 변한다 하더라도 신학을 하는 우리들은 ‘사람에 대한 관심’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인간의 머리로 알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내 주변의 사람들을 가슴으로 바라보는 것이 더 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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