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에 들어와 지금까지 2년여 동안 가톨릭대학보사 기자활동을 해왔다. 모든 대한민국의 남자라면 한번쯤 고민해 봤을 국방의 의무 때문에 임기를 끝까지 채우지 못하고 미리 기자생활을 마감하게 되었다. 집에 오후 여섯시 전에 가 본적이 없고 이주에 한 번 주말이 찾아왔다. 나만의 개인적인 생활을 포기하면서 지금까지 대학기자로 무엇을 했나 생각해보니 글로 담을 수 없는 많은 가르침과 인터뷰이들에게 보고 들은 배움에 절로 겸손해진다.
이번 신문의 마감주를 보내는 동안 십 년 전 학보사기자생활을 거쳐 간 선배를 만나 잠시 추억이된, 추억이 될 기자생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선배와의 대화로 ‘내가 지금껏 대학교 학보사 기자로 무엇을 했나’에 대한 고민의 답을 얻을 수 있었다. 신문에 기재되는 기사는 영어로 ‘article’ 이다. article의 앞 글자 세 개만 봤을 때 ‘art’다.
영어는 어원을 중요시하는 언어라고 영어선생님들이 수업시간마다 강조하셨던 기억이 난다. 이렇게 생각을 하면 어쩌면 기사(article)는 하나의 예술(art)로 해석해 볼 수도 있겠다. 어느 사건을 가지고 글을 쓰고 그 현장을 카메라로 담아내어 재구성 하는 일. 선배는 그것이 기자가하는 예술적인 행위라고 해석한 것 같다. 나는 이년동안 해온 인터뷰이 사진찍기와 살벌한 시위현장의분위기, 활기찬 학교 행사의 분위기를 내 카메라에 담아 전달하는 이런 모든 행위를 카메라와 함께한 예술 활동의 순간으로 해석하고 싶다. 어쩌면 안전하고 탈 없이 신문에 기재될 보도사진은 정형화되고 형식적인 행사사진일 수 있다. 하지만 여태까지 보지 못했던 시선으로 조금 더 재미있고 사진만 봐도 사진기자가 무엇을 보여주고자 하는지 알 수 있는 사진을 찍기 위해 무릎을 아끼지 않고 누비는 철면피가 되고자 했다.
또한 마감주의 밤샘활동이 하나의 예술작품‘신문’을 만들기 위한 작업이었다고 표현하고 싶다. 어쩌면 우리 모두 대학 생활이 예술 활동이었던 것 같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인생’이란 작품을 만들기 위해 지금까지의 삶 그리고 앞으로의 삶은 예술적 행동이다. 하지만 예술적 행동으로 평가 받기에는 너무나 큰 조건이 있었다. 그것은 예술가 자신의 정성과 혼, 남다른 노력이 꼭 존재했어야 예술로서 남에게 평가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카메라에게 물었다. 내가 사진취재를 할 때는 예술이었냐고, 그러자 카메라는 대답했다.
‘찰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