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수] 사람의 손길
[우수] 사람의 손길
  • 강나루(신학 4)
  • 승인 2018.12.11 10:07
  • 호수 3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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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손길’에 대한 기록을 하고 싶다. 2016년 여름, 인도 캘커타 공항에 내렸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의 시성식도 곧이어 있었고, 이곳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싶은 마음으로 왔다. 인도에 오기 전 마더 데레사 사랑의 선교회의 활동 모습을 여러 사진첩을 통해서 보았다. 사진 속에 모습은 너무도 처참한 빈민들의 모습과 그 속에서 사랑으로 활동하는 사랑의 선교회 수녀님들의 기도하는 모습과 봉사하는 모습을 담은 것들이었다. 어떤 사진첩은 1960년대에 제작되기도 했다. 사진첩을 보고 적잖이 충격을 받았고, 아마도 세월이 조금 지났으니, 나아졌을 것이고, 사진첩 속에 그런 상황들은 사진가의 의도에 따라, 극적으로 연출되어진 것이라는 생각도 했다. 아니, 그랬으면 좋겠다고 믿고 싶었다.

 

그런데 공항에서 나오자 만난 것은 아무것도 입지 않고 구걸하는 눈이 큰 아이들이었다. 먹을 것을 조금 주니, 어디선가 아이들이 우르르 구름처럼 몰려들어 내 소지품을 뺏으려 했다. 그 무리를 빠져나와 택시를 타고 콜카타 AJC 보스 로드 54A 사랑의 선교회 본원으로 향했다. 택시 기사는 바가지요금을 씌우느라 콜카타 시내 곳곳을 뱅뱅 돌아 나를 그곳으로 안내했다. 그런데 그 허름한 노란 택시의 뿌연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시의 참상을 담은 영화를 보는 듯했다. 폐허로 변해버린 도시에 시간마저 정지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사진첩에서 보았던 그 걸인들의 처참한 모습이 너무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사랑의 선교회에 봉사활동을 등록하러 갔는데, 사랑의 선교회에 막 입회한 듯한 흰 사리(Sari, 인도 여성들이 입는 일상복으로 면포로 둘려 입는 소박한 옷)를 입은 청원기의 수녀님들이 나를 맞았다. 소박하지만 청결한 수녀원에 들어오는 순간, 환한 웃음으로 나를 맞이하는 수녀님의 ‘나마스테’라는 평온한 인사가 시끄럽게 울리는 경적소리의 복잡한 콜카타 거리의 모습과 너무도 대조적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가까운 곳에 있는 저렴한 숙소를 소개 받고, 그곳에 묵으며, 5개월여를 봉사활동을 했다. 이슬람 주거지역에 있었던 고메즈 하우스라는 봉사자들을 위한 게스트 하우스에 묵었다. 그리고 매일 아침 15분 정도를 걸어서 본원으로 가는데, 거리에서 보이는 생명이 경각에 달린 죽어가는 사람들을 너무도 쉽게 목격할 수 있었다. 이 처참한 상황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한 2주는 밥도 제대로 넘어가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그랬을까? 봉사활동을 떠나기 전 아침 기도 시간마다 정말 간절히 기도했던 것 같다. 이 고통의 현장을 어떻게 허락하셨는지 따지기도 했던 것 같다. 제발 이런 모습을 없애달라고 애원하며, 세상의 죄 속에서,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침마다 본원에서 미사를 드리고, 봉사활동을 하기로 등록한 임종의 집‘Nirmal Hriday’(벵갈어로 ‘순수한 마음’이라는 의미)에 갔다. 그곳에는 그런 길거리에서 죽어가던 사람들을 인도하여 최소한의 의료 지원과 아주 소박한 숙식을 제공했다. 침상은 남자 50개, 여자 50개었는데, 늘 바닥에 추가 침상을 깔고, 120여명 정도의 죽어가는 노숙자들을 보살폈다. 그중에 몇몇 분들은 그곳에 온지 몇 시간 만에 돌아가시기도 하시고, 몇 주를 버티다가 돌아가시기도 했다.

내가 있던 게스트 하우스에서 한 한국인 봉사자를 만났다. 바오로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수차례 봉사활동을 이곳에서 했다고 자신을 소개하면서, 한국에 있을 때에도 소록도에서 오랫동안 봉사활동을 했다고 했다. 바오로에게 이곳에 대한 정보를 많이 들었다. 그리고 소록도에 대한 이야기도 자신이 봉사를 하면서 보고, 느낀 것을, 같이 식사를 하고, 같이 콜카타 시내 이곳저곳을 돌아보면서, 이야기해 주었다. 그분은 소록도에서 맑은 그 무엇을 보았음에 틀림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나도 소록도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오로를 통해 전해 들었던 소록도는 사람 냄새 나는 사람들이 사는 곳처럼 느껴졌다.


이곳 콜카타 사랑의 선교회의 여러 빈민 사목 시설에는, 사회 복지사도 아니고, 성직자나 수도자도 아닌데, 봉사를 거의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콜카타에서 그런 장기 봉사자들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돈이 되는 것도 아닌데, 자기 돈을 들여서, 또는 어떤 단체에 지원을 받아, 여기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고 했다. 세계 각지에서 그런 사람들이 여기로 모였다. 많은 사람들은 사회 활동가에 가까웠고,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서 이곳에서 일화들을 글로 써서 책으로 내거나, 사진으로 담아서 전시회를 하거나, 그림으로 표현하는 예술가들도 있었고, 봉사활동을 온, 자유분방한 학생들도 많았다. 내가 만났던 바오로는 자유로운 여행가에 가까운 기질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소록도에서 봉사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센병에 대한 여러 상식들을 내게 틈틈이 알려주었다. 한국 사람들은 쉽게 전염이 되지 않는데, 어릴 때 대부분 자신은 기억 못하지만 예방접종을 받았거나 원래부터 내성이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인도를 비롯한 몇몇 저개발국가에서는 아직도 만연하는 한센병이고, 사람들의 무지 속에서 병자를 죄인처럼 취급하는 분위기가 이곳 콜카타에서는 만연하다고도 전했다. 그리고 그 사람들도 사회적 편견 속에서 자신의 병을 자신의 손자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아 한다고 했다. 한참을 바오로 형제님의 소록도 체험기를 들다 보면, 자연스럽게, 나도 나중에 그곳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그가 만났던 사람이 그리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곳에도 한센병 환자들의 보금자리가 있다고 했다. 매주 목요일이 봉사자들의 휴일이었는데, 2주에 한 번씩은 목요일에 사랑의 선교회에서 운영하는 ‘한센병 환자들의 센터’에 간다고 했다. 그리고 사랑의 선교회 봉사자들과 함께 그곳에 갔다. 가는 사람이 많으면 버스를 대절해 가기도 했고, 사람이 적으면, 콜카타 시내에 있는, 시엘다역에 가서 기차를 타고 1시간 반 정도를 더 가서, 한센병 환자들의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입구에는 마하트마 간디의 사진과 마더 데레사 수녀의 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었고, 이곳은 사랑의 선교회에서 운영하는 한센병 환자 센터였다. 그곳까지 가는 길은 편하지 않았다. 기차역 까지 가는 버스의 상황은, 한국에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금방이라도 사람이 떨어질 것 같은 만원버스를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어야 할 것 같은 소년 승무원이 문에 매달려 더 이상 사람을 실을 수 없을 정도로 실고 갔다. 기차로 갈아타도, 상황은 다르지 않아, 출퇴근 시간에 우리네 지하철처럼 한가득 사람들을 실고 기차는 달렸다. 그렇게, 한센병 환자들의 센터에 도착했을 때쯤이면, 거의 녹초가 되어 있었다.

 

한 영국인 젊은 봉사자가 입구에서 봉사자들을 안내했다. 방문자들에게 한센병에 대한 교육을 20분 정도, 상세히 해줬다. 어떤 병이며, 어떻게 감염되고, 전 세계적으로 5~600만 명이 넘는 환자들이 있다는 것까지, 한센병에 대한 정보를 나름 상세히 방문객들에게 소개했다. 많은 사람들의 무지 속에서, 인도의 종교 신심 안에서, 한센병 사람들은 죄인으로까지 몰린다고 했다. 병이 걸리면, 직업도, 집도 제대로 구할 수 없기에, 사회에서 추방되다시피 한다는 사실까지 전했다. 마더 하우스 봉사자들은 마치 관광을 하듯이, 그곳의 소개를 듣는다. 그러기에 봉사자들 중에는 관광을 온 것처럼 즐기는 사람도 있었고, 열악한 환경에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둘러보듯, 숙연해지는 사람들까지 다양했다. 나는 그곳에서 사람이 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센터 안으로 들어가니, 한센병 환자들의 아기들을 돌보는 건물이 있었고, 그곳에는 큰 눈의 인도 아이들이 즐겁게 놀고 있었다. 방문객들과 다르게 그들은 인도인 특유의 즐거움을 가지고 있었다. 이유 없는 천성적인 즐거움을 그들은 가지고 있었다. 아이들과 인사를 하고, 그곳을 지나, 한센병 환자들이 일하는 작업장에서는 베틀을 돌려 천을 짜고 있었다. 치료를 마치고 상태가 호전된 환자들이 그곳에서 일을 한다고 했는데, 생각과는 달리 사람들은 유쾌해 보였다. ‘나마스테’라고 인사하며,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어 열심히 일하여 우리를 환영했다. 그곳을 지나, 치료중인 환자들이 누워있는 곳에 갔다. 문드러진 손과 발에 붕대를 감고 누워 있는 사람들도 어렵게 합장한 손으로 ‘나마스테’라고 웃으면서 인사를 했다. 나도 모르게 그 사람들의 손을 맞잡고 인사하게 되었다. 그 모습 속에서 기뻐하는 사람도 있었고, 고마워하는 사람도 있었다. 한센병 환자들이 그리워하는 것은 사람의 손길과 온정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그리워하는 것과도 다르지 않았다. 그들이 준 밝은 인사가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 그곳을 지나, 한센병 환자들이 치료를 받는 드레싱룸에 갔다. 드레싱룸이라고는 간단한 소독약을 바르고, 붕대로 곪는 부위를 감싸주는 것이 전부처럼 보였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그 사람들은 통증이 사라지면 곧잘 웃었다.

센터는 생각보다 넓었고, 한센병 환자들이 잘 가꾼 정원과 밭에서 곡식들을 추수하고 있었고, 농장에는 염소들도 키우고 있었다. 목장에서 일하고 있는 마을 내 주민들을 보면, 그 풍경이 담장 너머의 세상과 다르게 목가적이기까지 했다. 같이 온 한 미국인 방문객은 이곳 사람들도 급여를 받느냐고 안내자에게 물어보았다. 일을 하고 있는 환자들은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급여를 지급하고 있다고 안내자는 답변했다. 한 두 시간 남짓 짧은 방문을 마치고 나오는데, 과연 이 사람들이 가진 기쁨의 근원은 무엇일지 골똘히 생각하게 되었다.

봉사활동이 없는 목요일 그곳을 몇 번을 오가면서, 내 스스로 부끄러운 생각이 밀려왔다. 쉽지 않은 한센병이 걸린 그 사람들도 웃는데, 나는 무엇이 문제여서 그분들이 가진 평온이 없을지 생각하게 되었다. 그분들을 통해, 고통이 아니라, 평화가 무엇인지 배워온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편견을 벗고, 사랑의 마음으로 그분들의 손을 맞잡을 수 있는 것은 너와 내가 남이 아니라는 생각 속에서 가능할 수 있었다. 그렇게, 그분들이 행복의 스승이라는 가르침이 내 내면에서 울리는 듯했다. 그렇게, 그곳에서 봉사하다보면,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행복에 감염되고 만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마스크와 장갑이 벗겨진다. 그 때가 돼서야, 그 사람들의 마음의 상처를 어루만질 수 있다. 그리고 내 상처도 치유 받고 온다. 그렇게, 그곳에서 사랑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인도에서 다섯 달을 봉사하면서 느낀 것은, 그 사람들을 통해서 내가 오히려 치유 받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봉사하려 왔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곳에 온 봉사자는 말 못할 큰 상처를 가지고 와서, 그 상처를 이곳에서 봉사하면서 녹이고 있다는 것을 머지않아 이곳의 봉사자들과 내밀한 이야기들을 나누며, 같이 봉사하고 땀방울을 흘리며 알게 되었다.

하루는 사랑의 선교회의 원장 수녀님이 새벽 미사가 끝나고 나를 찾았다. ‘Nirmal Hriday’에 지적 장애를 가지고 있는 세 친구들의 이름을 대시며, 기차로 8시간 거리에 있는 ‘로우캘라’ 분원에 이송을 도울 수 있는지 물었다. 그렇게, 사랑의 선교회 수녀님 세 분과 지적 장애가 있는 친구들과 함께 야간열차를 타고 여행을 가게 되었다. 나는 원장 수녀님께서 도와달라고 간곡하게 말씀하셨기에, 도무지 거절할 수 없었다. 말길도 전혀 알아들을 수 없고, 거동도 불변하고, 대소변도 스스로 가릴 수 없는 그 친구들을 데리고 기차를 탔다.

기차표 한 구석에는 ‘한센병은 치료할 수 있습니다.’(Leprosy can cure!)라고 적혀 있었다. 그 문구가 한센병 환자들이 이곳 인도에서 사람들의 무지 속에서 얼마나 오해되고 천대받고 있는지 말해주는 듯했다. 그렇게 인도의 빈민가로 깊숙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팔다리가 썩어가는 환자를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제는 그런 풍경을 보는 것도 더 이상 충격이 되지 않을 즈음에, 그곳의 사람들을 통해서 사랑을 배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그분들의 천진한 웃음이 어디에서 오는지 놀랍고, 신기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처음에는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 그분들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거짓말처럼 이해가 되었다. 그분들은 생명이 무엇인지 사랑이 무엇인지 분명히 깨닫고 있었다. 그 진실한 웃음은 그 사람이 바라보는 삶이 단순히 고통의 오늘에 있지 않음을, 현세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까지 이르게 했다. 내가 만난 대부분의 인도 빈민들은 자신이 모시는 힌두(Hindu) 신(神)께 정말 열심히 기도했다. 아침에도 눈뜨면 기도했고, 일을 시작할 때도 기도했고, 잠이 들 때도 기도했다. 마치 신앙이 삶의 일부가 아니라, 오히려 삶이 신앙의 일부가 된 사람들 같았다. 그러기에 그 사람들은 정말 말도 안 되게 열악한 고통 중에서도 웃을 수 있었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 사람들은 내게 환한 웃음을 통해서, 삶을 관통하는 사랑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고 있었다. 그분들을 통해서 사랑을 배웠다고 고백하게 된다. 어떻게 그것을 말도 다 표현할 수 있을까? 우리가 나눈 손길과 눈길 속에 녹아 있는 사랑은 내게 지울 수 없는 무엇이 되었다. 이곳에서 봉사하고 있는 장기 봉사자들 수녀님들은 종종 환자들을 통해 경미한 감염성 질병에 걸리기도 한다. 또 환자들을 돌보다가 걸렸을지도 모를 에이즈 검사를 주기적으로 하기도 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처음에 이해되지 않았던 것들이, 한센병 환자들의 손을 맞잡고 맑은 눈길을 나누면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게 지워지지 않는 사랑을 배웠다. 그곳에서 내 마음의 상처도 치유되었다. 그리고 이제 작은 육신의 흉터를 얻어왔다. 그 상흔을 볼 때 마다, 나는 사랑의 손길을 느낀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의 손길’을 통해 왔다. 그 손길은 ‘사랑의 울림’으로 내 몸에 각인되었다. 나는 분명 그분들을 통해서 ‘사람의 손길’을, 그분들의 눈빛과 함께 환한 웃음을 통하여, 진하게 알게 되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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